[살며 사랑하며-이주은] 흥에 겨워서 하는 일
입력 2010-03-04 20:04
공연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수첩에 ‘할 일’ 메모가 꽉 찬 날이었지만 몇 주 전부터 꼭 보려고 기다려 왔던 공연이 메모의 맨 끝줄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마냥 행복했다.
메모들을 하나씩 지우고 마침내 운전대를 잡았다. 그날따라 유독 심하게 길이 막혔다. 공연을 보기 전에 요기라도 좀 하려고 한 시간 넘게 여유를 두고 출발했는데, 공연 시간에 맞추기조차 촉박할 정도였다.
도착해 보니 주차장은 이미 꽉 차 있고, 주차하려고 주변을 빙빙 돌다 보니 이상하게도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봄날에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불현듯 ‘그냥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목적지를 발로 한 번 밟아보지도 않은 채 바로 앞에서 차를 돌려 집으로 왔다.
어디선가 읽었던 왕휘지 이야기가 생각났다. 밤이 깊었는데, 갑자기 멀리 사는 친구가 가슴 저미도록 보고 싶어진 왕휘지는 배를 띄워 밤새 노를 저었다. 그러고는 새벽녘 마침내 친구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얼굴이라도 보고 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무엇 때문에 밤새 고생스럽게 갔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온 걸까. 왕휘지는 그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다. 집을 나선 것은 흥이 일어서 그랬던 것이고, 집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그 흥이 다해서 그런 것이라고.
나도 그랬나 보다. 공연 티켓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들뜨게 했었고, 더 보여주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제 값을 다 한 것이었다. 과정이든 결과이든 흥 자체가 곧 값어치이고 보상이라는 뜻이다. 흥을 빼앗기는 시점은 어디선가 내게 흥 대신 돈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때다. 흥과 돈은 별개여야 하는데, 어느 순간 흥이 아닌 돈만 보상이라고 여기게 된다. 흥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오래 전에 어느 유대인이 미국 남부의 도시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에 사는 아이들이 그의 아들에게 매일 모욕적인 욕설을 퍼부었단다. 아들이 울면서 집에 오는 것을 보고 유대인은 무언가 생각한 듯 학교로 갔다. 그는 학교 앞에 서 있다가 아이들이 아들에게 욕을 할 때마다 25센트씩 주었다. 인센티브를 받은 아이들이 신이 나서 몰려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부터 유대인은 10센트씩 주기 시작했고, 보상이 줄어든 아이들은 시끄럽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 다음날 유대인은 여전히 투덜거리는 아이들에게 5센트씩 주었고, 또 그 다음날에는 1센트짜리 동전을 각각 손에 쥐어주었다. 화가 난 아이들은 유대인에게 소리쳤다. “쳇, 1센트로 뭘 하라는 거야, 이제 안 해!”
욕을 하는 것 자체에 재미를 두고 있었던 아이들은 이제 돈을 받고 노동을 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었다. 물론 그 결과 흥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당신이 돈을 벌고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 가만히 되짚어보자. 과연 무엇이 스스로에게 보상이 되고 있는지, 흥인지 아니면 돈인지.
이주은 성신여대 교수 미술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