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인도 중산층 부패 권력에 맞섰다… 20년 전 14세 소녀, 경찰 간부에 성추행
입력 2010-03-04 22:40
성추행 당한 한 소녀의 해묵은 자살 사건으로 인도가 들끓고 있다. 부패한 권력, 부조리한 사법제도가 얽힌 이 사건의 진실이 20년 만에 드러났다. 뉴욕타임스(NYT)는 인도 중산층의 성장과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2일자에서 상세히 보도했다.
1990년 8월 12일 당시 하리아나주 경찰 고위 간부이자 지역 테니스협회장인 삼부 프라탑 싱 라토르는 14세의 유명 테니스 선수 루치카 기로트라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특별지도’라는 말을 믿고 친구 아라드나와 함께 찾아간 루치카는 그곳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안 루치카의 아버지는 라토르를 성추행 혐의로 고발했다.
루치카의 아버지는 힘없는 은행 간부였기에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인도에선 흔한 일이었다. 대신 보복이 시작됐다. 루치카가 다니던 가톨릭 사립학교는 수업료 체납을 이유로 그녀를 퇴학시켰다.
3년 후 대학생이던 루치카의 오빠 아슈는 억울하게 차량 절도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은 아슈를 구타하고 구금했다. 수갑을 채운 채 거리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경찰은 루치카에게 “니 오빠 꼴을 봤냐. 아버지도 곧 끌려올 거다”라고 윽박질렀다. 루치카는 괴로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루치카의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다른 주로 떠났다. 반면 정치권에 줄을 댄 라토르는 승승장구해 1999년 하리아나주 경찰청장까지 올랐다.
진실을 파헤친 것은 친구 아라드나의 부모였다. 사건을 지켜본 아라드나의 아버지는 “내가 가만히 있으면 내일엔 내 딸이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소송을 시작했다.
한 TV 뉴스 채널이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인도에선 권력층의 비리와 성추문은 흔한 일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시민들의 항의가 거셌다. 1990년대 경제 개혁 이후 목소리가 커진 중산층이었다. 시청자와 신문 구독자의 호응에 언론은 연일 크게 보도했다. NYT는 “이 사건은 인도 사회의 모든 모순을 드러냈다”며 “중산층은 루치카에게 닥친 불행이 자신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노했다”고 전했다.
결국 주 고등법원은 99년 재수사를 결정했고, 이듬해 1월 라토르는 성추행 혐의로 기소됐다. 라토르의 아내는 유력한 변호사였다. 변론을 400여 차례 연기하며 시간을 끌었다. 소송 10년 만인 지난해 12월 라토르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6개월 징역형과 벌금 1000루피(약 2만5000원). 그나마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보석으로 풀려났다.
판결이 나온 뒤 인도에선 다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인도 정부는 형법을 개정해 성범죄에 대한 신속한 수사와 재판을 약속했다. 루치카의 아버지는 라토르를 자살 교사와 구금 협박 혐의로 다시 고발했고, 소송이 진행 중이다. 자살 교사는 최고 10년형에 해당한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