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안중근의 위대한 사순절
입력 2010-03-04 20:06
“순국 전날까지 쓴 영웅의 붓글씨… 전국순회전 통해 100년전 위업 기려야”
아동문학가 한 분은 안중근 100주기를 맞으니 부끄러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어린 시절, 삼촌의 손에 이끌려 간 극장에서 ‘안중근’ 영화를 보면서 수염이 하얗고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에서 크게 울었다는 것이다. 분별력 없는 어린이의 해프닝이겠으나 우리 교육의 현실이기도 했다. 지금도 안중근을 ‘의사(醫師)’로 아는 젊은이가 적지 않으니까.
거기에는 흑백 사진으로 남은 모습이 일조했을 것이다. 깍두기 머리에 짙은 눈썹과 팔자수염, 그리고 벗과 의를 맺는 일,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기, 총으로 사냥하기, 준마를 타고 달리기를 좋아하는 한량 기질, 여기에다 하얼빈에서 적을 저격한 일까지 보태면 의협심 강한 조선 청년의 초상이다. 감옥에서 쓴 붓글씨와 저술 ‘동양평화론’, 자서전 ‘안응칠 역사’가 없었다면 그런 이미지로 오래도록 남았으리라.
글씨와 글은 그의 분신이자 치열한 고뇌의 산물이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항소를 포기한 뒤 먹을 잡았다. 그리고는 3월 26일 사형 집행 하루 전날까지 정결한 자세로 붓을 세웠다. 그 40일은 예수의 수난을 연상케 하는 시간이다. 당시 감옥에서 남긴 글씨가 200여점이고 현재 국내외에서 50여점이 확인되고 있다. 수신자는 검찰관과 간수 등 그에게 감화 받은 일본인이 대부분이다. 단추 하나, 고무신 한 켤레 남기지 않았으니 오직 글씨를 통해 그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아쉬운 것은 당겨진 처형일이다. 그는 ‘동양평화론’을 탈고하기 위해 보름의 말미를 요청했지만 일제는 거부했다. 이 때문에 그의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은 서론과 전감(前鑑)만 써놓고 본론격인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은 미완성으로 남겼다. 아내 김아려 여사가 무명적삼 차림에 코흘리개 두 아들을 데리고 불원천리 여순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불과 하루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정을 담은 전시가 지난 1월 말 서울 예술의전당을 떠나 지금 대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유묵 34점, 사진자료 40점 등 총 70여점으로 꾸며진 전시는 불멸의 애국자 안중근을 조명하는 수준급 기획전이었다. ‘愼獨’ ‘獨立’ ‘國家安危 勞心焦思’ ‘爲國獻身 軍人本分’ ‘志士仁人 殺身成仁’ ‘孤莫孤於自恃’ 등 힘 있게 쭉쭉 뻗어나간 유묵은 글씨 자체도 멋지거니와 문무를 겸비한 영웅의 전인적 인격을 볼 수 있었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모여들었다. 특히 장병 5000여명이 단체 관람한 것은 의미가 컸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다. 대구전이 막을 내리면 유묵은 소장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잇는 위인의 100주기를 이렇게 소홀히 해도 되나 싶다. 목숨처럼 아끼며 유품을 보관해온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 정도 수준의 전시라면 전국 순회전이 열려 그의 친필을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야 하지 않을까. 무명지 잘려나간 장인(掌印)과 거기에 새겨진 위인의 손금을 보면서 가슴 떨리는 경험을 공유해야 하지 않나.
문제는 돈이라고 한다. 운송, 보험, 디스플레이 합쳐 5000만원이면 유묵 컬렉션을 한 달가량 전시할 수 있는데, 지방마다 돈이 없어 속수무책이다. 성공했다고 알려진 서울전의 경비도 절반은 민간이 댔다. 그것도 이름이 알려진 대기업이 아니라 평소 안 의사를 존경해 오던 부산 지역 금융인들이 1억원 정도를 모았다는 사실에서 안 의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알 수 있다.
안 의사 순국일이 코 앞에 다가왔다. 말로는 ‘겨레의 위대한 스승’하면서도 중앙과 지방 정부는 무엇을 준비했는지 대체 알 수 없다. ‘大韓國人 安重根’을 대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가 이러니, 정부가 국민에게 어떻게 애국심을 호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앞으로 우리 후손이 영화 속 할아버지를 안중근으로 여겨도 정말 괜찮다는 것일까.
손수호 논설위원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