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2010년 취업 보고서] 백수의 도발, 노조 만든다… ‘청년유니온’ 대표 김영경
입력 2010-03-04 18:06
“상의 좀 드릴 게 있어요.” 젊은 여성 목소리였다.
“회사 상사에게 성희롱당했는데…. 상사랑 둘이 근무하는 2인 회사예요. 문제 삼고 싶은데 잘릴까봐서요.”
전화를 받은 ‘청년유니온’ 김영경(30·여) 대표는 잠시 고민했다.
이런 일은 보통 친구에게 털어놓든지 전문 상담소를 찾기 마련이다. 청년유니온은 아직 설립 준비 단계인 노동조합.
이 여성은 왜 이름도 낯선 곳에 전화했을까.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한 인턴이었다. 직장 고민을 어디에 얘기해야 하는지 몰랐다. 또래들이 노조를 만든다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이게 88만원 세대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혹독한 경쟁에 시달리다 비좁은 사회 진출 관문에 끼인 청년들. 그 88만원 세대가 움직인다. ‘백수’ ‘알바’ 파견직 계약직 젊은이들이 정규직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노동조합을 만든다. 국내 첫 청년노조를 꿈꾸는 김 대표를 지난 1일 만났다.
-청년노조라니, 생소합니다.
“15세부터 39세까지 일하거나 일하고자 하는 청년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이에요. 실업자 취업준비생 알바생 단기취업자 비정규직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조직하고 있어요.”
-청년유니온은 13일 창립총회를 열고 노동부에 노조 설립신고를 할 예정이다. 정식으로 고용된 사업장이 없는 이들의 노조가 성립될 수 있을까.
“청년 개개인이 가입하는 일반노조 형태예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피고용자만 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규정은 없어요.”
-그 법률 제2조는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금지하고 있던데요.
“구직자와 실업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는 2004년 대법원 판례가 있어요. 근로자 범위를 넓힌 거죠. 변호사와 노무사로부터 문제가 없다는 자문도 받았고요.”
청년유니온 사무실은 서울 당산동에 있다. 시민단체인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 사무실 한켠을 빌려 책상 2개를 놓았다. 상근자는 김 대표와 조금득(31·여) 사무국장. 조 국장은 경기도 수원의 한 공장에서 파견근로자로 일하다 합류했다.
지난해 8월 노조 설립 준비를 시작해 12월 포털사이트 다음에 카페를 열었다. 현재 온라인 회원 560명에 창립 발기인 60명이 확보됐다. 발기인은 대학원 조교, 청년인턴, 취업준비생 등이다. 회원 연령층은 10∼30대, 직업은 알바부터 일반 사무직까지 다양하다.
조합비는 각자 월 수입의 1%를 내는 걸로 했다. 그러나 실업자와 10대 청소년에겐 월 3000원만 받는다. 인터넷 카페에는 주로 알바 임금 체불이나 실업급여 등에 대한 상담요청 글이 올라온다.
-왜 청년노조를 만들려는 거죠?
“저부터 전형적인 88만원 세대예요. 대학생활은 아르바이트로 점철됐고 졸업 후엔 보습학원 강사를 했어요. 대형마트 파견근로자 생활도 했죠. 임금체불은 다반사고 최저임금도 남의 나라 얘기였어요. 부당한 대우를 누구도 고쳐주지 않잖아요? 청년들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착한 아이 콤플렉스요?
“파견근로자나 비정규직 논란은 유럽과 일본에선 훨씬 먼저 일어났던 일이에요. 그곳 청년들은 시위나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명했죠. 그런데 우리 청년들은 ‘땡깡’ 부려도 누가 뭐라고 못할 만큼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목소리를 내지 못해요. 행여 취업에 문제가 될까봐 기성세대 요구대로 움직이고 있어요. 착한 아이들이죠.”
-외국에도 이런 노조가 있나요?
“일본의 수도권청년유니온을 모델로 했어요. 2008년 ‘히비야 파견촌 투쟁’(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에 실직된 파견근로자들이 모여 6일간 시위한 사건)을 주도한 단체죠. 당시 참가자가 2000명이 넘었고 모금액도 2300만엔이나 됐어요. 결국 후생노동성 장관이 나와 사과하고 사태 해결을 약속했습니다.”
-청년실업 당사자들이 직접 나섰군요.
“그래서 우리도 당사자 운동을 하자는 거예요. 우리 세대는 너무 수동적이거든요. 서울광장에 청년백수 1000명만 모여도 사회적 인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1만명이 모이면 어떻게 될까요?”
-요즘 대학생들은 빚지고 공부해도 장래가 불투명한데 원인이 뭘까요?
“지금 4년제 대학 졸업자는 1990년대 고졸, 전문대졸과 처지가 같아요. 사회 전체가 다운그레이드됐어요. 대기업과 공공기관은 일자리를 줄이고,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격차가 너무 커요. 정부가 등록금 지원 대신 학자금 대출을 확대해서 많은 대졸자가 빚을 안고 사회에 나와요. 근데 은퇴는 빨라지죠, 부모님 부양해야 하는데 출산은 또 장려하죠. 이런 상황인데 우리더러 눈이 높다고만 해요. 정말 억울하지 않겠어요?”
-노조 설립 후 첫 활동은 뭐죠?
“최저임금 인상 운동부터 할 거예요. 다음은 취업준비생 구직급여 지급 운동이고요. 궁극적 목표는 청년 구직자 대부분이 정규직으로 일하게 되는 세상을 만드는 거예요.”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오는 6월 노동부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 앞서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최저임금 인상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다. 지난 3일에는 40여개 시민단체가 고용안전망 확충을 위해 발족한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구직급여제도 도입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청년들이 최저임금, 부당해고, 실업급여 등 노동문제에 제대로 대응하도록 교육하는 ‘알자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청년유니온의 지향점은요?
“누구는 정당 만들려는 거냐고 묻는데 그럴 생각 전혀 없어요. 정치권에서 들어오는 연대 제안도 최대한 신중히 판단하고 있죠. 한마디로 이거예요. 청년실업, 그동안 많이 참았다, 누가 해결해주리라 기다렸는데 아무도 안 해주더라, 이제 직접 나서자, 우리도 요구사항 말할 자격은 있지 않은가.”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