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차남 광명씨 ‘아버지 말년의 삶’을 밝히다

입력 2010-03-03 19:05


“약물중독·아사설 사실 아니다”

‘감자’ ‘배따라기’ 등의 작품을 쓰고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친일 논란에 휩싸인 작가 김동인(1900∼51)의 말년 삶에 대해 차남인 김광명(67·사진)씨가 직접 입을 열었다. 계간 ‘대산문화’ 올 봄호에 실린 기고문 ‘나의 아버지, 김동인을 말한다’를 통해서다. 지금껏 확실한 경위가 밝혀지지 않은 채 설로만 떠돌던 김동인의 사망 당시 정황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김씨는 기고문에서 아버지의 사인과 관련, “아버지는 6·25 당시 중풍을 앓아 거동이 힘들었다”며 “어머니는 자식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후 다시 아버지에게 가려고 했지만 군인들의 피란 대열 통제로 돌아갈 수 없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후 온양 피란민 수용소에 있던 가족들이 51년 8월 서울에 돌아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며 “아버지가 아사했다고 하는 것은 아사와 병사의 차이점도 모르고, 조사를 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무식하고 무책임한 문헌”이라고 비난했다.

그동안 김동인은 약물 중독으로 인해 6·25 당시 가족과 함께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아사(餓死)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김씨는 또 “‘창조’ ‘영대’ 등을 발간하느라 유산을 다 쓴 것은 맞지만, 이후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취직도 했고, 열심히 문필 생활을 해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를 했다”면서 “어린 시절 바나나를 간식으로 먹고, 백화점에서 옷을 사는 등 부유한 편이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씨는 기고문에서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버지를 친일파로 몰아붙인 것은 친일로 볼 수 있는 글 몇 개보다 해방 후에 쓴 좌파에 대한 맹렬한 비난 글이 비위를 건드린 것”이라며 “현재 정부를 상대로 이에 대한 행정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당시 전업 작가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일방적이고 왜곡된 시각으로 인민재판식의 판결을 내리고 있다”며 아버지를 변호했다.

김씨는 김동인이 1931년 결혼한 김경애 여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7남매 중 차남으로, 경복고와 연세 의대를 졸업한 후 한양대에서 33년간 교수로 일하다 지난 2월 퇴임했다.

한편 대산문화재단 측은 “지난해 11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김동인을 친일 작가로 규정하면서 아들인 김씨가 이에 대한 변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말했다.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