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6) 허창수 GS그룹 회장] 현장·내실 경영으로 그룹 탄탄히 키워
입력 2010-03-03 22:11
“경영은 구씨 집안이 알아서 잘할 테니 돕는 일에만 충실해라.”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고 구인회 LG창업회장에게 자본을 투자한 경남 진주의 만석꾼 고 허만정씨가 자손들에게 당부했다. 1년 뒤, LG그룹의 모체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창립과 더불어 허(許)·구(具) 양가의 동업이 시작된 이래 허씨의 당부는 3대에 걸쳐 금과옥조처럼 지켜져 온 계명이 됐다.
2004년 초 양가 가문이 동업한 지 57년 만에 LG로부터 독립한 허씨 가문의 GS는 에너지와 유통을 중심으로 업종 전문화를 꾀하고 있다. 출범 당시 18조7000억원이었던 자산규모는 4년 만에 39조원을 달성하면서 재계 7위(공기업 제외)로 도약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46조원으로 첫해의 2배를 넘어섰다. 출범 6년째인 올해 매출목표는 50조원에 맞춰져 있다.
70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GS의 사령탑은 허창수(62) 회장. 창업주 허만정의 손자이자 남촌 허준구(전 LG건설 명예회장)의 첫째 아들인 그에게도 허씨 가문의 경영철학이 묻어난다.
2008년 10월. 대우조선해양을 둘러싼 인수전이 한창 치열한 때였다. 당초 인수 의사를 타진하던 GS가 막판에 인수 포기를 전격 선언했다. 허 회장이 “해운업황이 하락세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인수가격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너무 보수적인 결정”이라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조선경기가 급락하고 우선협상대상 기업마저 인수에 실패하자 “허 회장이 용기있는 결단을 내렸다”는 평가로 바뀌었다.
이에 대해 GS 관계자는 “내실을 중시하는 허씨 가문의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LG시절, 구씨 가문이 주로 사업 확장과 공장 건설 등 바깥일을 맡아 사업을 키우고 경영을 주도했다면, 숫자에 밝은 허씨 가문은 재무와 영업 분야 등 안살림에 주력해온 스타일과 궤를 같이한다. 허 회장 역시 LG상사에서 일반상품과장으로 잠시 일한 것 빼고는 20여년간 관리파트에서 안살림을 책임져 왔다. 이익과 손해 가치를 꼼꼼히 따지고 흔들림 없이 실행에 옮기는 내실 경영이 여기서부터 싹튼 셈이다.
미래 트렌드를 짚어내고 속도감 있게 사업을 추진하는 허 회장의 스타일은 선친을 꼭 빼닮았다. 1970년대 후반, 국내 경기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업계 전반적으로 사업을 축소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허준구 당시 금성전선(현 LS전선) 사장은 한국광업제련(현 LS니꼬동제련 등으로 분리)을 인수하면서 대한전선을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섰다. “구리 같은 기초소재는 기존 사업과 연관이 많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허 사장의 판단이 한몫한 것이다.
지난달 초, GS는 백화점과 대형마트를 롯데그룹에 1조3400억원에 매각했다. 유통분야 중 비핵심사업 분야를 떼내면서 현금동원력을 확보한 것. 이와 더불어 GS는 지난해 5월 인수한 (주)쌍용(현 GS글로벌)을 주축으로 해외 플랜트 사업 확대와 석유·화학제품 수출대행 사업 등을 추진 중이다. 재계 관계자는 “GS가 군살을 빼고 미래 먹거리 준비를 위해 조직의 체질을 빠르게 바꾸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선친의 경영방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은둔의 경영자라고요? 나만큼 지하철 타고 아무데나 잘 나다니는 사람도 드물낀데….”
허 회장은 2005년 7월 기자간담회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해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GS출범 초기, ‘얼굴없는 CEO’로 불릴 만큼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다. LG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공식적인 스포트라이트는 구씨 경영진에게 양보하고 대신 뒤에서 묵묵히 일을 챙기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룹 출범 이후, 허 회장이 현장 경영을 강조하면서 외부로 드러난 그의 성향은 “선이 굵고 소탈하다”는 평이 많다. 허 회장의 경남중·고 동기동창인 김동헌 인터콘티넨탈호텔 사장은 “허 회장은 풍부한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믿고 맡기는 선이 굵은 경영자”라며 “무엇보다 상대방을 편하게 배려하는 기술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골프 라운딩에서도 동반자들에게는 ‘OK(컨시드)’ 주는 것에 관대하지만 정작 자신은 ‘OK’ 받는 걸 거부하는 ‘외유내강’형의 단면도 엿보인다.
그러면서도 골프를 하러 지방에 갔다가 차가 많이 막힐 것 같으면 홀로 기차를 타고 귀가한다든가, 가까운 약속 장소엔 비서 없이 홀로 이동하는 습관 같은 내실을 따지는 스타일도 여전하다. 결국 허 회장의 경영과 일상 속에서도 선대가 물려준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셈이다. 실리를 철저히 추구하되 내일을 내다볼 줄 안목, 상대방을 향한 배려가 GS를 이끄는 힘이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