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선율·그림… 그리움 품은 ‘통영의 봄’
입력 2010-03-03 17:25
붉은 동백꽃이 거리를 수놓은 통영의 봄은 처절하도록 아름답다. 그리움 실은 파도가 쉼 없이 밀려오는 통영의 봄은 미어지도록 애잔하다. 사고파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강구안 활어시장과 달동네 사람들의 꿈을 그린 동피랑 벽화골목에도 처절하고 애잔한 봄이 찾아왔다. 유치환의 시와 윤이상의 선율이 그곳에서 만나 화려한 봄나들이에 나선다.
유치환, 유치진, 김상옥, 김춘수, 박경리, 윤이상, 전혁림…
경남 통영이 고향인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통영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삼도수군통제영의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들의 원고지와 오선지, 그리고 캔버스에 통영의 바다색깔과 파도소리가 짙게 스며들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통영이 우리나라 문화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작가들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한 유전적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통영사람들은 그 뿌리를 삼도수군통제영의 객사인 세병관에서 찾는다. 세병관(洗兵館)은 서울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 두보의 시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현판 이름을 따왔다.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어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이 훗날 통영을 예술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한 힘의 원천이었다고나 할까.
학교 선후배 사이인 그들은 툭하면 남망산에 올랐다. 지금은 조각공원으로 변한 남망산은 정상에 서면 여황산과 망일봉의 치맛자락에 포근하게 안긴 통영 시가지가 두루마리 그림처럼 펼쳐지는 명소. 청마 유치환은 이곳에서 쉴 새 없이 몰려오는 무심한 파도를 보고 ‘그리움’ 등 수많은 시를 남겼다.
아홉 살 연하인 윤이상은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작곡가의 꿈을 키웠고, 윤이상과 동년배인 전혁림은 푸른 바다로부터 영감을 얻어 코발트 블루색이 인상적인 서양화를 개척했다.
청마의 발자취는 복원 공사가 한창인 통제영 유적지 앞에서 통영중앙동우체국까지 200m 남짓한 청마거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통영여중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청마는 가정교사로 부임한 9세 연하의 정운(시조시인 이영도)에게 연심을 품는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청마는 닿지 않는 인연이 안타까워 20년 동안 5000여 통의 연서로 그리움을 달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은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길 건너 정운이 살고 있는 이층집을 바라보며 쓴 연시. 통영중앙동우체국 앞에는 대리석 시비가 세워져 청마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통영이 낳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현대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윤이상의 체취는 오는 19일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식 때 개장하는 도천테마파크(윤이상기념공원)에서 만나볼 수 있다. 윤이상거리와 생가터 사이에 위치한 기념공원의 전시실에는 생전에 연주하던 첼로 등 유품 412점도 전시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윤이상의 현대음악이 너무 어려워 문외한은 들어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윤이상의 젊은 시절 선율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통영에서 중고교를 다닌 사람은 누구나 부르는 교가의 십중팔구가 유치환이 작사하고 윤이상이 작곡했기 때문이다.
백수를 바라보는 서양화가 전혁림의 작품은 남망산에서 만나는 통영의 야경을 무척 닮았다. 암청색 하늘과 바다를 캔버스 삼아 불을 밝힌 색색의 가로등과 어화의 물그림자는 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강렬한 이미지를 그린다.
미륵도를 한바퀴 도는 산양관광도로에서도 전혁림의 작품 ‘통영항’처럼 강렬한 색채의 그림을 만난다. 봄비가 동백나무 가로수를 휩쓸고 지나자 송이 째 뚝뚝 떨어진 붉은 동백꽃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을 그린다. 그 작품 속에서 억척스런 통영의 아낙들은 검은 갯바위에서 굴을 따고 어선은 뱃고동 소리와 함께 푸른 캔버스를 오간다.
동피랑 벽화골목은 통영을 대표하는 설치작품. 동피랑은 통영의 대표적 어시장인 중앙시장 뒤쪽 언덕에 있는 마을로 ‘동쪽 벼랑’이라는 뜻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오르면 담장이나 옹벽을 캔버스 삼아 화려한 색채의 벽화를 그린 달동네가 눈길을 끈다. 동피랑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의 동포루가 있던 자리. 통영시가 동포루를 복원하기 위해 달동네를 철거하려고 하자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벽화를 그렸고 이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들자 통영시는 철거방침을 철회했다.
통영의 섬과 바다는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미륵산에서 볼 때 가장 멋스럽다. 저 멀리 한산도와 우도 연화도 매물도 등 150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는 사람마다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 우리가 미륵도 미륵산 상봉에 올라 한려수도 일대를 부감할 때 특별히 통영포구와 한산도 일폭의 천연미는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할 뿐이다. 이것은 만중운산 속의 천고절미한 호수라고 보여진다. 차라리 여기에서 흐르는 동서지류가 한려수도는 커니와 남해 전체의 수역을 이룬 것 같다.’(정지용의 ‘통영5’ 중에서)
해방 직후 통영을 찾은 정지용 시인은 청마의 안내로 미륵산 신선대에 올랐다. 그리고 발아래 펼쳐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황홀한 풍경에 취해 할 말을 잊었다. 훗날 정지용은 부산, 통영, 진주를 둘러보고 쓴 기행문 ‘남해오월점철’에서 통영의 바다와 섬을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고백했다.
‘향수’의 작가 정지용 시인을 매료시킨 통영의 바다와 섬들. 봄기운 완연한 그 바다와 섬들이 원고지와 오선지, 그리고 캔버스 속으로 동양의 나폴리를 꿈꾸고 있다.
통영=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