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시설 1층만”… 규제 포로된 기업
입력 2010-03-02 19:49
롯데백화점은 오는 5일 서울 재동에 2층 규모의 어린이집을 연다. 롯데백화점의 당초 계획은 소공동 본점 16층 직원식당 옆에 육아시설을 두는 것이었다.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짬을 내 아이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직장 보육시설은 1층에 둬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본점에서 차량으로 15분 거리에 있는 건물을 빌려야 했다. 현행 ‘영유아보육법 시행규칙’은 건물을 육아공간과 다른 용도로 함께 활용할 경우 육아시설 위치를 1층에 두도록 제한하고 있다. 화재 등 긴급 상황시 대피가 쉽도록 하기 위해서다. 3층 이하 건물 전체를 직장보육시설로 쓸 경우에만 피난 경사로를 갖춘다는 조건 아래 2, 3층에도 보육시설을 둘 수 있다.
1층 건물을 활용하기 힘든 롯데백화점은 결국 별도 건물을 보증금 3억원에 빌려 공사비 4억4000만원을 투자해 복층 구조로 리뉴얼했다. 연간 운영비와 임차료도 4억8000만원이 든다. 시간 낭비, 예산 초과 지출을 감수해야 했다. 롯데백화점은 물리적 거리 탓에 셔틀버스를 운행키로 했다.
이철우 롯데백화점 대표이사 사장은 직원들에게 “아이 많이 낳아서 잘 기르라”고 덕담할 정도로 출산장려에 적극적이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9월 보건복지가족부와 ‘아이 낳기 좋은 세상 만들기’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CJ그룹도 2008년 4월 서울 신문로 단독주택에 10억원을 투자해 CJ키즈빌을 열었다. CJ는 남대문로 본사 건물이 남산 오르막길에 위치한 탓에 1층은 주차장, 2층은 로비층으로 쓰고 있다. 로비층에 육아공간을 만들어도 2층이기 때문에 규정에 걸린다. 이런 이유로 단독주택 건물을 장기 임차해 어린이집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출산·육아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는 대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직원 비중이 높아지면서 출산·육아 지원이 고급 여성 인력들을 직장에 잡아둘 수 있는 당면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했다가 규제 때문에 이상적인 계획을 수정한 기업들이 적잖다. 정부와 국회가 출산장려를 입으로 주문할 뿐 제도 개선엔 팔짱을 끼고 있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국회에 제출된 영유아보육법 일부 개정 법률안은 다문화가정 지원, 보육시설 종사자 교육 등 소프트웨어 강화방안은 담고 있지만 하드웨어 규제를 지적한 법률안은 없는 상태다. 대한상공회의소 규제개혁추진단은 직장보육시설 제한 규정에 대한 개선방안을 마련해 복지부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건의할 예정이다.
강남구와 포스코는 육아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포스코는 2일 대치동 포스코센터 1층 로비에 424.05㎡ 규모의 어린이집을 열었다. 육아시설이 강남 고가 건물 1층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강남구청의 의지 덕분이다. 강남구청은 어린이집 면적만큼 재산세 등을 면제해주겠다고 제안했고, 포스코는 1층 임대수익을 포기하고 4억원가량을 어린이집에 투입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부와 국회가 맞벌이 부부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이 될 만한 방안은 마련해주지 않으면서 출산·육아 지원에 나서는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유병석 기자 bs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