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원폭 지점 3.2㎞에 공장… 조선인 노무자 거의 사망”

입력 2010-03-02 19:06


제1부 일본 3대 재벌의 전쟁범죄

② 군수산업의 대명사, 미쓰비시


원폭 재앙까지 겪어야 했던 나가사키조선소 징용자들

이 같은 일본의 전쟁 거점에 수만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노역에 투입됐다. 1944년 당시 조선인 노무자 및 그 가족이 나가사키시에는 2만명, 나가사키현 전체를 통틀어서는 7만5000명이나 거주했다. 나가사키시 2만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미쓰비시 소속으로 조선소에만 4700여명이 배치됐다. 국무총리 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측이 녹취한 피해자들의 구술기록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식사는 콩밥, 콩찌꺼기야. 배가 고픈께 빼빼 말라서 입이 다 돌아가니 뭐 말할 게 있어. 비행기 싣고 대포·기관총도 걸고 하는 군함을 만들었지. 7층 높이에서 일했는데 저승이 어딘가 했는데, 죽어나오는 사람이 자꾸 날마다 몇이 나오거든. 전기하다가 감전돼 죽는 사람, 널쩌가(떨어져서) 죽는 사람, 날마다 죽어나오는 거를 예사로 보고 뭐. 내가 죽을 고비 한정 없이 넘겼어.”(김종술·1922년생·경남 산청군 천평리)

“나가사키조선소 가서 첨에 한 달 교육 받는데 부소장이라 카는 사람이 우리한테 와가지고 ‘우리 조선소는 동양에서 최고 가는 조선손데, 전쟁 안 났을거 가트면 한국 사람이라 카는 거는 도저히 일할 생각도 못했다. 지금은 우리가 내선일체니깐, 너희들은 우리 회사에 온 걸 큰 영광으로 생각해라’이러더라고.”(김성수·1925년생·부산 용호3동)

일제 강제동원 노무자 중에서도 히로시마와 함께 나가사키 피해자들은 원폭 투하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까지 겪어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군이 하필 나가사키를 지목해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을 투하한 것은 군수시설 파괴에도 목적이 있었는데, 그 주요 타깃에 미쓰비시 조선소가 있었다.

“조선소에서 일하던 공장이 폭탄 떨어진 데서 3.2㎞ 떨어졌어. 폭발 직후 큰 철문에 깔렸는데 피가 얼마나 흘렀는지 옷이 뻘겋게 젖은 거예요…. 공장에 조선 사람이 한 2000명 있었지. 살아난 사람은 많지 않아요. 한 80%는 죽었을 거야. 한 놈은 얼굴이 홀랑 다 타버렸는데, 뭘 매길라면 입을 벌리지 못해서 참대(왕대)를 잘라서 입에다 넣어가지고 그 참대에다 밥을 이렇게 쑤셔서 넣었어요. 먹어야 사니깐 억지로 매길라고. 그러니깐 싫다는 거예요. ‘이 자식아, 넌 먹어야 살아! 먹어야 살아서 같이 나가지. 이눔아!’ 그러니께 막 성을 내더니 ‘너 이 놈의 자식, 나 낫기만 해봐’ 그랬는데 결국은 죽었다구….”(김한수·1918년생·대전 용전동)

전시 때의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도 가동되고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 그 내부로 들어갈 수 없는지 다카자네 대표에게 물었다. 불가능하다고 했다. 예전에도 강제동원 피해자 몇 명이 진입을 시도했지만 미쓰비시 측이 완강히 거부해 무산됐다고 한다.



조선인 유골 무참히 버려진 다카시마탄광

조선소를 뒤로 하고 30여분 더 배로 이동해 다카시마(高島)에 도착했다. 나가사키 항구로부터 18.5㎞ 떨어진 이 섬은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던 곳이다. 나가사키에는 육지나 섬 지하로 굴을 파 들어가 바다 밑 수백m 아래까지 채굴하는 해저탄광이 여럿 발달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다카시마는 증기기관을 갖춘 일본 최초의 근대적 탄광이자 최대 해저탄광으로 널리 알려졌다. 본래 감옥노동, 즉 발목에 쇠사슬을 찬 죄수들의 노동력으로 개발돼 사측의 노무관리가 가혹하기로도 유명했다. 1881년 미쓰비시광업이 인수한 이후에도 인권의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쳤던 이곳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끌려와 막장에서 신음했다.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인 광부 및 그 가족 숫자는 3500명이나 됐다.

다카시마 부두에서 20분 정도 걸어 들어가자 석탄 자료관이 나타났다. 1986년 폐광한 다카시마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꾸민 곳이다. 혹시나 하고 각 전시물과 연표를 하나하나 주시했지만 그 많던 강제동원 조선인 광부에 대한 기록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다카시마가 일본 근대화에 공헌했다는 문구만 가득했다. 다카자네 대표는 “조선의 식민지화와 노동력 동원을 빼놓고 일본 근대화를 말할 수는 없는데…”라고 탄식처럼 말했다. ‘기록의 나라’라는 일본. 하지만 불리한 기록은 은폐하고 누락한다.

자료관 옆 공원에 바다 쪽을 향해 청동상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어떤 역사적 위인이기에 저렇게 큼지막한 전신상으로 건립돼 있나 궁금했다. 알고 보니 바로 미쓰비시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1835∼1885)의 동상이다. 이와사키는 본래 신분이 낮은 하급 무사였지만 메이지유신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의 국민적 영웅 사카모토 료마(1836∼1867)와 동향 출신이었다. 이와사키는 메이지유신 실세들과의 유착 관계로 미쓰비시 성장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가 죽은 뒤에도 미쓰비시는 정부의 강력한 비호 속에 군수품 수송을 독점하고 해운업, 조선업, 중공업, 광산업에서 급속도로 몸집을 불리며 군수재벌로 발돋움했다. 동상으로 남은 이 창업자는 회사 성장에 수많은 조선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번듯한 미쓰비시 창업자의 동상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인 노무자들의 유골은 투박한 돌비석 아래 처참한 상태로 버려져 있다. 섬 중앙에는 해발 120m 높이의 산이 있다. 언덕 정상에 자리 잡은 일본인 공동묘지를 지나 수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반대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산기슭 후미진 귀퉁이에 있는 비석 하나가 홀연 눈에 들어왔다. 아무 장식 없이 우둘투둘한 표면에 ‘供養塔(공양탑)’이라는 세 글자만 음각된 낡고 볼품없는 석비. 그 밑에 탄광에서 죽은 연고 없는 조선인 및 일본인 유골이 묻혀 있다고 했다.

본래는 공양탑 근처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사각형 모양의 납골시설이 있었고, 그 안에 유골항아리와 조선인 이름이 적힌 위패 등이 안치돼 있었다. 그러나 미쓰비시광업 측이 다카시마탄광을 폐광하고 1988년 완전 철수할 때 납골시설을 모두 파괴했다. 그러면서 각 유골의 뼈 일부를 제멋대로 분골(分骨)해서 인근 사찰 긴쇼지(金松寺)에 옮겼다. 결국 나머지 유골은 난잡하게 섞인 채 탑 밑에 한꺼번에 매립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긴쇼지에 보관된 종이컵 정도만한 크기의 작은 유골함에도 한국인 이름이 써있는 것은 없었다. 전체 106개 가운데 10여개에 일본인 이름만 적혀 있을 뿐, 나머지 유골함에는 아무 것도 기재돼 있지 않았다. 일본인 광부들은 대개 가족이 있었던 만큼 무연고 유골은 주로 조선인 노무자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성명 분류도 없이 뼈가 뒤섞인 상태여서 유골 주인을 확인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최악의 ‘지옥섬’, 하시마탄광

다카시마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소형 선박으로 갈아타고 무인도 하시마(端島)로 향했다. 다카시마에서 5㎞쯤 떨어져 있는 이 섬은 나가사키 징용자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작업장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잔인한 폭력이 육지와 철저히 고립된 광부들을 사투의 나날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조선인 노무자 사이에서 하시마는 ‘지옥섬’으로 통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외관상으로도 극도의 황량함이 섬 전체를 감돌았다. 보통 섬을 둘러싸고 자라는 울창한 숲이 이 섬 주변에는 없다. 모래가 깔린 해변조차 볼 수 없었다. 수목이 자라지 않는 불모의 섬. 오직 시멘트로 싸 바른 10m 높이의 방파제가 섬과 바다의 경계를 두르고 있어 자연이 아닌 인공 섬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섬 전체가 탄광으로 개발된 곳. 바닷속 지하 곳곳으로 수백m씩 갱도를 파내려간 전형적인 해저탄광.

미쓰비시광업은 다카시마탄광에 이어 1890년 하시마탄광을 인수했다. 이곳 석탄은 순탄발열량이 높고 유황, 인의 함유량이 적은 최고급 탄으로 주로 제철이나 선박용으로 쓰였다.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면서 하시마탄광은 채탄량을 증가시키라는 심한 압박을 받았고, 이는 그대로 올가미가 돼 조선인과 중국인 노무자의 목을 조였다. 이곳에는 조선인 징용자 500명, 중국인 전쟁포로 200여명이 강제노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하시마탄광 생존자 가운데 박준구(1920년생·전남 순천시 장안리)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징용 갔더니 하시마에 있던 사람들이 ‘아이고, 당신들도 고생혀. 여기 온 지 3년 됐는데도 안 내보내줘서 이러고 있어. 여기 들어오면 못 나가요’ 그래. 그 소리를 들응께 아이고메, 우리는 다 살았네, 아주 포기를 했어요…. 월급이 어디가 있어, 월급이? 밤낮 일만 하고. 식사라고는 주먹밥, 요만씩한 놈을 두덩이 줘. 그래서 탄광에서 워메, 우리 한국이 그렇게 좋았구나 싶은 생각이 나고. 말도 못해. 안 죽고 살은 것이 천운이지.”

징용자들은 매일 12시간씩 2교대로 노동했다. 승강기를 타고 수직갱도를 내려가 굴착장에 도착했다. 비좁은 막장에서 서 있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운 채 탄을 캐곤 했다. 매일 책임 출탄량(할당량)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지 못하면 나올 수도 없었다. 노무감독들은 모두 곤봉 모양의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1944년엔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조부) 당시 통상산업대신이 시찰을 나왔다. 그는 “여긴 전쟁터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더 열심히 탄을 캐라”고 생산력 증대를 지시했다(패전 후 그는 A급 전범이 됐다).

이 섬은 멀리서 보면 군함 한 척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일본인 사이에 ‘군칸지마(軍艦島)’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섬에 최대한 근접해 보니 과연 군함 형상이었다. 전체적인 지형도 그렇지만 그 위로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와 학교, 채탄시설들이 거대한 군함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하시마는 둘레가 1.2㎞에 불과한 작은 섬인데도 탄광 개발이 진전되면서 한때 5300명이 거주해 일본 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구로 꼽혔다. 좁은 터에 최대한 많은 인원을 상주시키기 위해 7∼10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가 1944년까지 10여동 세워졌고, 거기엔 주로 일본인 광부와 직원이 거주했다. 징용 노무자들은 아파트에서 떨어진 두 동짜리 조악한 건물에 따로 수용됐다. 건물 창문에는 전부 쇠창살이 쳐 있었고, 부근에는 10m 높이의 감시탑이 있었다고 한다.

섬을 반 바퀴 돌아 반대 편 측면 쪽으로 접근하자 접안시설이 있는 부교 뒤편으로 컴컴한 동굴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시바타 사무국장이 알려줬다. “저기 보이는 문이 갱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해서 ‘지옥문’이라고 불렸지요.” 그것은 지하 700m까지 내려가는 해저탄광의 입구 가운데 섬 안에서 제일 큰 것이었다. 광부들은 거기서 철망으로 만든 승강기를 타고 지옥 같은 막장으로 내려가 몸부림쳤다.

지옥섬에서의 탈출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많은 조선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했다. 바다에 뛰어들어 무모하게 헤엄쳐 도망가다 빠져 죽고, 도중에 일본인 노무관리자들에게 잡혀 맞아 죽기도 했다. 일제 강제동원 실태를 앞장서 고발했던 고 서정우(2001년 별세)씨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열네 살 때 하시마로 징용됐습니다. 나는 매일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쉬면 감독이 와서 관리사무소로 끌고 가 마구 구타를 했습니다. ‘예, 일하러 나갈게요’라고 말할 때까지 린치를 당했습니다. 제방 위로 멀리 조선쪽을 보면서 몇 번이나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동료 중에 자살한 사람이나, 육지로 헤엄쳐 도망하려다 빠져 죽은 사람이 40∼50명 있었습니다.”

하시마는 1974년 폐광된 이후 거주자가 모두 떠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완전한 무인도가 됐다. 남은 건물도 몹시 낡은데다 일부는 무너져 내려 거대한 잿빛 폐허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가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는 동안 참혹했던 강제동원의 진실은 망각의 늪으로 깊숙이 잠겨가고 있었다.

특별기획팀=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