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5) 이명희 신세계 회장] 현모양처 꿈꾸던 막내딸이 유통업계 ‘철의 여인’으로

입력 2010-03-01 21:55


이명희(67) 신세계 회장의 어렸을 적 꿈은 ‘현모양처’였다. 그랬던 이 회장이 사회진출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아버지인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때문이다. 이 회장은 2005년 사보에서 “내가 39세가 됐을 때 신세계에서 일을 해볼 것을 권유한 것은 아버지였다. 당시 아버지의 지론은 ‘여자도 가정에 안주하지 말고 남자 못지않게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고 스스로 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강요에 나는 현모양처의 꿈을 접고 신세계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 회장은 귀여운 막내딸이었다.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한 이 회장은 냉철하면서도 ‘여성적’인 면이 있던 아버지를 위해 핑크색 단추를 단 화려한 와이셔츠를 만들었다. 낡고 초라해진 만년필에 액세서리를 붙여 새 것처럼 선물하기도 했다. 막내딸은 아버지가 사무실에서 먹는 과일 맛을 먼저 본 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지 확인하고 들여보내기도 했다.

선대 회장도 이런 막내딸을 매우 아꼈다. 선대 회장은 1년에 네 차례 정도 일본을 방문했는데 항상 장녀 이인희 한솔 고문과 이 회장을 데려갔다고 한다.

이 회장은 연말 딱 한 차례 임원 정기인사를 제외하곤 첫 출근 전날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침인 ‘서류에 사인하려고 하지 말라’를 지키고 있다. 신세계 그룹의 결재라인에 ‘회장’ 사인란이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이 회장이 아버지의 조언을 철저히 따른 덕분에 1991년 삼성그룹에서 공식 계열분리를 선언했을 때 백화점 점포 2곳과 조선호텔만 가졌던 신세계를 현재 백화점 8곳, 이마트 국내 127곳, 중국 24곳 점포와 13개 계열사를 가진 국내 최고의 유통명가로 키워낼 수 있었다.

신세계의 모태는 1930년 문을 연 국내 최초 백화점인 미스코시 경성지점. 한국 전쟁 이후 동화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꿨고 삼성이 1963년 인수했다. 삼성은 신세계백화점으로 상호를 바꾸고 60년대 불모지와 다름없던 국내 유통환경에서 기존 임대상가 형태 매장을 직영체제로 전환하며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64년 상공부로부터 정찰제 시범 백화점으로 지정되면서 정찰제 전면 실시와 백화점 카드 도입 등 각종 ‘최초’ 기록을 쏟아내기도 했다.

1987년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방황의 시기를 보내던 이 회장은 미국에 체류하면서 프라이스 클럽과 월마트 등 창고형 점포를 둘러보게 됐다. ‘이거다’ 싶었다. 이 회장은 프라이스 클럽과 제휴해 운영 노하우를 습득하고 유통 트렌드를 분석해 한국에 맞는 새로운 할인점 업태를 개발했다. 93년 서울 창동에 최초로 테스트 점포를 연 것이 오늘날 이마트의 시작이다. 이 회장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찾은 미국에서 신규 사업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회고했다.

이마트 도입에 따른 고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신세계는 97년 외환위기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그해 삼성그룹으로부터 공식 분리된 신세계백화점은 99년 ‘신 윤리경영’을 선포했고 2001년 상호를 신세계백화점에서 신세계로 바꿨다.

이 회장은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믿지 못하면 아예 쓰지를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의 아버지 뜻을 좇아 전문경영인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가 바로 삼성 비서실 출신의 구학서(64) 회장이다.

99년 대표이사에 취임한 구 회장은 12월 새로운 CI와 함께 윤리경영을 바탕으로 한 ‘신 경영이념’을 발표했다. 지난 10년간 신세계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지난해 신세계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2조7000억원, 9200억원으로 10년 전보다 각각 5.5배와 10.2배 늘었다. 고용인원은 4642명에서 1만4910명으로 늘었고 주가도 8.4배 올랐다. 5000명 이상의 비정규직 인력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신세계의 성장은 윤리경영이라는 든든한 정신적 기반과 구 회장을 끝까지 믿어주던 이 회장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7년 ‘스타벅스커피코리아’ 설립에도 윤리경영, 신뢰에 대한 이 회장의 관심이 담겼다. 그는 “스타벅스 사업을 시작한 건 단지 수익 때문이 아니라 스타벅스 본사의 사회봉사와 공헌에 대한 정신, 기업문화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회장은 선진 유통기법을 배우기 위해 1년에 석달 이상 정유경 부사장과 함께 미국 유럽의 백화점을 순방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