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9) 서있기만 해도 ‘짱’
입력 2010-03-01 17:43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단정학(丹頂鶴), 참 늘씬하다. 보름달 둥두렷이 떠오르자 혓바닥 굴리며 한 곡조 뽑는다.
자태는 얼마나 고혹적인가. 부리에서 꼬리에 이르는 몸체가 아찔한 S라인이다. 한 발은 똑바로 딛고 한 발은 들어 살짝 굽힌 저 포즈, 요즘 모델의 ‘캣 워크’ 저리 가라다.
천년 사는 학이 백년 사는 소나무에 앉았다. 학은 일품이요, 소나무는 정월이란 뜻을 지녔으니 얼추 이 그림 그린 날은 정월 대보름이렷다. 오래 살면서 고고한 품성 잃지 말라는 기원이 담긴 서상도인데, 황새나 백로와 달리 학은 소나무에 오르는 법이 없어 실경은 아니다. 옛 그림은 뜻에 따라 꿰맞춘 짜깁기가 많다.
짝짓기를 앞둔 학은 몸짓이 요란해진다. 머리를 위 아래로 흔들고 빙빙 돌면서 활개를 친다. 그 우아한 사위를 본떠 학춤을 만들었을 터. 허나 대대로 학은 선비와 유자(儒者)의 본보기였다. 오죽하면 선비가 입는 옷을 학의 깃털로 지었다 해서 ‘학창의’라 불렀을까. 그런 선비가 채신머리없이 덩실 춤을 춘다? 아무래도 모양 같잖다.
당나라 백거이가 ‘학’이란 시에서 지적했다. ‘누가 너더러 춤 잘 춘다 했나/ 고요히 서있는 것보다 못한데’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서 안 되지만 학의 날개가 크다고 춤판에 부를 건가. 그냥 서있어도 학은 본새가 난다. 너무 요염하게 그린 게 흠이지만.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학고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