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국민투표
입력 2010-03-01 17:43
모든 국민이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민주정치와 게르만족의 민회(民會)에 뿌리를 둔 직접민주주의는 스위스를 제외하고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스위스는 ‘뭐 저런 사소한 문제까지 국민 의사를 묻느냐’고 할 정도로 국민투표가 잦은 나라다. 지난해 11월 이슬람 사원을 지을 때 모스크의 상징인 미나레트(첨탑)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키기도 했다.
넓은 국토와 많은 인구로 직접민주주의가 사실상 불가능한 세계 여러 나라들은 대안으로 국민투표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국민투표는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처음 실시됐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한 뒤 황제가 되기 위해 고안한 게 국민투표다. 결국 루이는 국민투표에서 신임을 받아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국민투표를 효율적 통치수단으로 가장 잘 활용한 지도자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재임 10년 동안 그는 총 다섯 차례나 국민투표 카드를 빼들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로 국민투표에 부친 지방자치체 및 상원 개혁안이 52.4%의 반대로 부결되자 임기를 3년이나 남겨두고 전격 하야했다. 야심차게 추진한 정책에 대한 반대를 불신임으로 간주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1962년, 69년, 72년, 75년, 80년, 87년 여섯 차례 국민투표가 있었다. 모두 헌법에 관한 국민투표였고 정책에 관한 국민투표는 없었다. 75년 2월 유신헌법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있었을 뿐이다. 현재 국민투표는 두 가지 경우에만 실시할 수 있다. 헌법을 개정할 때와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다. 유신헌법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대통령에게 포괄적인 국민투표 부의권을 부여했으나 유신헌법에 대한 반작용으로 5공화국 때부터 국민투표의 범위를 제한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때가 되면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이) 중대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중대결단이 무엇인지 공개하진 않았으나 국민투표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한나라당이 끝장토론까지 했음에도 결론을 내지 못했으니 청와대로선 무척이나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세종시 수정안이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해당되느냐를 놓고 논란이 뜨거워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 또한 쉽지 않을 듯하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