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화장실보다 중요한 것

입력 2010-03-01 17:45


그들이 돌아온다. 17일간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그들이 귀국한다.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새벽잠을 설치면서 중계를 지켜보았던 이번 경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꼽으라면? ‘퀸 연아’의 경기? 물론 황홀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순간 살짝 경직까지 됐던 장면은 따로 있다.

지난달 23일 펼쳐진 아이스댄싱 경기. 여자 선수가 남자 선수의 허리와 허벅지를 잡고 번쩍 들어올린 채로 빙판을 가로질렀다. 그 순간 21세기에는 성 차이까지 극복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즐거운 상상이 ‘휙…’. 생물학적 성을 가리키는 섹스(sex)에 대비해 쓰고 있는, 사회학적 성을 의미하는 젠더(gender). 그를 대신할 다른 새로운 단어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젠더는 1995년 9월 5일 베이징 제4차 여성대회 정부기구 회의에서 채택된 단어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젠더는 남녀차별적인 섹스보다 대등한 남녀간의 관계를 내포하며 평등에 있어서도 모든 사회적인 동등함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2001년 여성부가 출범하면서 젠더란 말은 자주 쓰였으나 생소하다. 여성부는 2005년 여성정책에 거부감이 커진다고 해서 젠더를 ‘남녀별’로 풀어쓰기로 했다.

젠더 개념이 도입되면서 남녀 차별을 없애고 남녀 차이를 감안한 법률 제도 등이 마련됐다.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일상생활에 가장 밀접한 것은 공중화장실법이 아닌가 싶다. 제·개정 과정을 보면 젠더 의식의 발전도 엿볼 수 있다.

2004년 제정된 이 법은 공중여성화장실의 대변기 수를 남성화장실 대·소변기 수의 합 이상이 되도록 설치기준을 정했다. 우리나라에 공중화장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4년. 공중화장실 역사 100년 만에 비로소 화장실 평등(?)의 주춧돌이 놓인 셈이다.

2006년 이 법은 수용인원이 1000명 이상인 공연장 전시장 야외극장 공원 등지의 공중화장실은 여성화장실 대변기 수를 남성화장실 대·소변기 수의 1.5배 이상 되도록 설치해야 한다고 고쳤다. 한 조사에 따르면 화장실 1회 사용시간이 남성은 1분24초, 여성은 3분이라고 한다. 화장실 평균 출입횟수도 남성은 5.5회, 여성은 7.7회다.

올 2월에는 남성화장실에도 영유아용 기저귀교환대를 설치해야 한다는 항목이 신설됐다. 이 법을 대표 발의한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은 남성의 육아 참여에 대한 불편을 해소하고 남녀평등 실현을 위해서 발의했다고 했다. 남성의원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니 고마울 뿐이다. 그러고 보니 공중화장실법을 정한 것도 남성의원들이었다. 한나라당 심재철 오세훈 윤경식 의원이었다.

여성들이 생리적 특성 때문에 겪는 불편 해소를 위해 법률 제정에 나서고, 아빠들도 젖먹이 기저귀 가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한 남성의원들. 그런 그들이 왜 국격(國格)을 높이는 지름길이며, 여성들의 숙원사업에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일까.

올 6월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성계는 ‘2010 지방선거 남녀동수범여성연대’를 지난해 11월 발족했다. 지난달 말 가진 기자회견에서 연대 대표들은 정당들이 지방선거 여성참여 확대 의지가 없다고 털어놨다. 특히 일부 남성 정치인들은 최소한의 여성할당 강제조치까지 반대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연대가 요구하는 것은 선출직 30% 여성 할당이다. 세계 90개국 이상이 실시하고 있는 여성 할당제는 유엔에서 결과적 평등 실현을 위해 권고한 사항이기도 하다.

국력을 반영한다는 올림픽에서 우리는 상위권이다. 밴쿠버에선 5위, 베이징에선 7위를 했다. 우리나라 여성의원 수는 2009년말 현재 전체의원의 13.7%로 세계 87위(세계의원연맹)이며, 여성정치참여율은 115위(세계경제포럼)다. 이만하면 남성 정치인들이 여성 정치인들을 위해 한수 접어줘야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