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이덕일] 다시 3·1절을 맞으며
입력 2010-02-28 20:00
3·1운동은 민족사의 큰 충격이었다. 그간 객체로만 여겨졌던 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 민족은 매로 다스려야 한다’면서 초등학교 교원들에게도 군복 차림에 칼을 차고 교단에 서게 하는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이런 극단의 공포정치를 뚫고 연인원 200만에 달하는 민중들이 시위에 나섰으니 일제가 충격받은 것은 당연했다. 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꿔야 했다. 충격은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기폭제 역할이었는데 이들도 민중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박영효 윤치호 한규설 윤용구 등 구왕조의 고위직 출신들도 민족대표 참여를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 시기가 아니라거나 일제에 청원서를 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의 눈에는 일제의 압도적 무력만 보였지 민중은 보이지 않았다. 3·1운동은 국내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압록강 대안(對岸) 서간도와 두만강 대안 북간도는 물론 러시아령 연해주와 미주에서도 일어났다.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보에서는 3월 12일 서문밖 교회에서, 북간도 용정에서는 3월 13일 낮 12시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서전평야에서 민중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민중을 발견한 독립운동가들은 큰 자신감을 얻었다. 철기 이범석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기미년(1919) 직후 상해의 우리나라 사람은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독립이 다 된 것 같은 기대감 속에 있었다”라고 서술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 해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임시정부가 삼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것은 획기적인 사실이다. 수천년간 왕조체제만 경험했던 나라에서 압도적으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게 된 데는 3·1운동에서 확인된 민중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3·1운동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립’되었음을 명기했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도 “우리 대한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정신과 뿌리는 3·1운동에 두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좌우파, 빈자와 부자, 지역간 분열과 갈등이 만연해있다. 어떤 현안이 돌출될 때마다 상대를 비난하면서 서로 목소리를 높이기 일쑤이고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갈등을 해소할 중심 사상이나 가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중심 사상과 가치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저마다 목소리만 높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중심사상과 가치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3·1정신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헌법은 말해주고 있다. 3·1정신을 중심으로 사회갈등을 바라보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갈등 해결점 시사
3·1정신은 무엇보다도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정신이다. 그 토대 위에서 민족단결을 추구했다. 소수의 친일 부역자를 제외하고 좌우를 뛰어넘어 모든 계급이 참여했다. 둘째는 평화 정신이다.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절차상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초석이라는 적극적 사상이 담긴 평화였다. 겉으로만 평온한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셋째는 민족자결 정신이다.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지구상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했다. 티베트를 비롯해 이민족의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들을 3·1정신으로 바라보면 무관심할 수가 없다. 3·1정신은 박제가 될 수 없는 사상이고, 3·1운동은 지나간 과거가 될 수 없는 사건이다. 3·1정신의 시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조망하면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일제의 공포통치에 맨손으로 나섰던 91년 전 그날의 그 심정이 다시 필요한 때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