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사랑 뿌리는 항일운동”
입력 2010-02-28 19:37
한국인의 유별난 축구 사랑은 3·1운동 실패 이후 축구가 항일 투쟁의 성격을 띠면서 비롯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외교학과 석사과정 변성호씨는 28일 축구가 처음 전래된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발간된 신문과 잡지 17종과 조선왕조실록 등을 분석한 ‘스포츠를 통한 인정투쟁-일제 식민지 시기 축구를 중심으로’라는 석사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변씨 논문에 따르면 한국 축구는 1910년대까지 기본적인 규칙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원시적 수준이었다. 하지만 1921년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를 기점으로 기량이 급성장해 1926년에는 배재중학교가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 우승했다. 조선축구단은 1927년 극동올림픽 우승팀인 일본 와세다 팀을 2승 1패로 꺾었다. 이듬해 상하이에서 열린 서양인 팀과의 대결에서도 4승 2패로 승리했다. 이러한 선전에 힘입어 축구는 1930년대부터 사실상 ‘민중의 국기’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변씨는 “한국 근대화에 영향을 끼친 일본, 미국에서와 달리 유독 한반도에서 축구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일본과 대결해 이길 수 있는 종목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3월 1일자에서 ‘우리의 국기인 축구’라는 표현을 처음 썼고 같은 해 4월 16일자에서는 “우리 겨레가 사는 그 어떤 곳에서도 뽈차기(축구)를 모르는 이가 없다”고 보도했다.
변씨는 “주체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조선 민중이 억압자 일본과 대결해 이기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며 “세계 무대에서 월등한 기량을 뽐내 스스로의 국제적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한 측면도 있다”고 주장했다.
조국현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