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기획] 모리야 요시히코 도우토대학 前 교수 “강제동원은 日 정부·기업의 공모”
입력 2010-02-28 19:13
제1부 일본 3대 재벌의 전쟁범죄
① 왜 기업이 문제인가
모리야 요시히코(70·사진) 전 교수는 일제 강제동원 분야를 연구하는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탁월한 실증적 이론가로 명성이 높은 학자다. 일본 근현대사를 전공한 그는 홋카이도의 도우토(道都)대학, 나가사키의 사세보(佐世保) 공업고등전문학교에 재직할 당시 대기업 스미토모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조선인 노무동원자 명부를 샅샅이 분석하고 검증해 30여년간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도 4개 기업의 10만쪽에 달하는 강제동원 자료를 정리 중이라는 노학자를 지난 1월 18일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자택에서 만났다.
우선 강제동원 과정에서 기업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 물었다. 그는 “강제동원은 일본 정부와 기업이 공동모의로 진행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노동력이 계속 부족하자 일본 정부와 기업 양쪽 다 조선인 동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모집’ 방식으로 시작해 ‘관(官) 알선’ ‘징용’ 등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기업들이 좀 더 쉽게 조선인들을 동원하기 위해 정부에 강하게 요구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모집이라면 조선인들이 기업의 채용 선전에 자발적으로 응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유 모집이라고 하면 기업이 자체적으로 공고를 내고 노무자가 자유롭게 계약을 하는 것이지요. 당시 모집은 처음부터 기업이 ‘언제까지 어느 작업장에 몇 명이 필요하다’고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정부가 거기에 맞춰 지역과 인원을 할당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모리야 전 교수에 따르면 기업은 처음에는 월급 35∼45엔, 많으면 50∼80엔을 약속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월급날 10엔 이상 주지 않았다. 식비로 15∼18엔을 제하고 각종 세금과 보험료, 강제저금을 원천징수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삽과 곡괭이 등 작업도구와 이불 사용료까지 월급에서 뗐다고 한다. 폭력도 횡행했다. “특히 토목, 항만 하역장 같은 경우는 폭력이 일상다반사였습니다. 노무계 사무실에 곤봉, 일본도, 엽총, 독일산 셰퍼드 등을 상비하고 있었죠. 야쿠자 폭력단 출신을 노무감시자로 둔 곳도 많았습니다.”
자신도 일본인이지만 그는 일본 기업의 자세에 깊은 아쉬움을 표시했다.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관련 자료도 공개하지 않아요. 인정하면 보상해야 하고 골치 아프니까. 그러나 자꾸 숨기려고만 하지 말고 사실을 밝히는 것이 기업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 중국 등과 계속 거래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의 메시지는 명료했다.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할 건 해야지요. 피해자들이 고령인데, 빨리 서둘러야 합니다.”
오무라(나가사키)=글·사진 김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