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싸우는 인간의 생존과 몰락… ‘재와 빨강’

입력 2010-02-26 18:00


재와 빨강/편혜영/창비

악취가 나고 오물이 썩고 생명 있는 것들의 최후가 처참하게 묘사된 문장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편혜영(38) 표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된다. 편혜영은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상상의 세계를 정교하게 그려낸 단편들로 문단에 이름을 새겨왔다. 그의 첫 장편 ‘재와 빨강’(창비)에도 여전히 쓰레기와 죽은 쥐의 시체와 갖가지 오물과 악취와 피로 범벅돼 있는 불쾌한 가상 세계가 펼쳐진다.

일단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 보자. 제약회사 직원인 주인공은 C국의 본사로 발령받는다. C국은 전염병이 창궐해 곳곳이 쓰레기로 넘쳐나고 도시의 기능은 마비된 상태다. 출근 명령을 기다리던 그는 본국에서 전처가 칼에 찔려죽었으며 그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후 그는 형사로 의심되는 방문자를 피해 창 밖 쓰레기장으로 뛰어내리고, 낯선 타국에서 부랑자 생활을 시작한다. 하수구에 살며 그가 하는 일은 ‘쥐잡기’다. 그는 자기가 ‘쥐가 된 느낌’을 받으며 쥐를 죽일 때만 ‘쥐와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는 ‘더러운 회색 가죽 바깥으로 붉은 내장이 툭 터져 나오도록’ 쥐를 뭉개 죽인다. 그에게 있어 생존의 느낌은 타인, 혹은 다른 생물을 파멸시킬 때 얻어지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C국에서 살기위한 발버둥은 점점 더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열심히 살려는 욕망이 오히려 인간의 생존 조건을 박탈시키는 아이러니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지진이 예고된 나라에서는 미약한 진동으로도 사람이 죽는대요. 살고 싶은 사람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서 죽는 경우래요. 살고 싶은 욕망이 죽음을 부른다니 재밌지 않나요?”

재미라니…. 생에 대한 열망이 파국을 부르는 냉혹한 서사와 독자를 섬뜩하게 만드는 문장을 천연덕스럽게 펼쳐놓는 작가다운 대답이다. 어둡고 불쾌한 소설과 달리 그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곱게 자란 사람’이지만 상상력의 회로가 자동적으로 괴기스러운 방향으로 흐른다”며 “저 왜 그럴까요?”라고 반문하는 귀여운 뻔뻔함이라니.

“바이러스가 창궐해 99.99퍼센트가 죽는다고 해도 자연면역을 갖춘 생존자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독성 강한 쥐약이 오히려 생존력 강한 쥐를 양산하듯이 전염병은 사실상 인간이라는 종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한다.”(117쪽)

소설의 주 모티프는 ‘전염병’과 ‘쥐’다. 전염병은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실체를 확인할 수도, 원인을 알 수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쥐 역시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살아남은 쥐들의 생존력은 강해진다. 그 어떤 전염병이 세상을 뒤덮어도 결국은 생명력을 유지해나간다는 점에서 인간과 쥐는 일맥상통한다.

작가는 이러한 파국과 생존의 아이러니,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남겨지는 고독감에 대해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신종 플루 파동을 보면서 ‘전염병의 시대’를 사는 개인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평범한 개인이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그 과정에서 전해지는 불안과 고독의 문제로 관심이 쏠리더군요.”

고독은 3부로 이루어진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아내의 죽음을 전해들은 직후 주인공은 ‘전처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 또 그는 C국에서 모국어를 듣기 위해 수없이 국제 전화를 건다.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름을 대기도 한다. 그가 원하는 건 “그 분은 퇴사하셨습니다”라는 존재의 확인이지만 “그런 분은 없습니다”라는 자신과 단절된 말만 되풀이해 듣게 된다. 철저한 존재의 부정이자, 근원적 고독의 탄생이다.

가상의 세계임에도 그 안에서 한 유약한 인간이 감내해야하는 처절한 존재의 소멸과 부정의 서사는 생생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이 불쾌한 실감은 우리가 사는 현실은 편혜영이 구축하는 그로테스크한 세상보다 더 괴기스럽고, 우리라는 존재는 쥐만큼이나 무력하다는 통찰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C국이라는 미지의 공간에서 존재를 거세당한 주인공이 그래도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끈질기게 이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수밖에.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