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의 이건 뭐야?] 졸업식 알몸 뒤풀이

입력 2010-02-25 17:58


올해 유난히 시끄럽지만 돌이켜 보면 해마다 중·고등학교 졸업식 때문에 시끄럽지 않았던 적이 없다. 계란에 밀가루를 범벅해서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곧 부치기만 하면 될 것 같은 꼬락서니로 만들어 놓는 거야 애교라 친다 하자. 하지만 옷을 죄다 벗기고 못살게 군다든가 또 그걸 동영상으로 찍는다든가 하는 건 아무리 ‘애들이 철이 없고 혈기가 넘쳐서’라고 넘기려 해도 심한 일이다.

가해 학생들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하는 일”이라고 항변했다.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더욱 놀랐지만 이 아이들이 유독 독하고 뻔뻔스러워서 안면 몰수한 대답을 한 게 아니다. 물론 그 또래 아이들이 죄다 순수하고 고운 마음을 지녔는데 가해 학생들만 유독 불량하고 악랄한 심성을 지닌 아이들이라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단정하는 게 어른 입장에서는 편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정도겠지만 아이들 인격의 질이 나빠지고 있어서는 아니다. 다만 자극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아이들은 여러 번 다쳐 본 적 있는 어른들보다 물신주의 유혹에 더 쉽게 빠져든다. 물신은 우리에게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어떻게 해서든 가져야 하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데 선수다. 우리는 그것이 필요해 사야만 한다고 느끼는 게 아니다. 그게 없으면 외롭고 불행할 것 같아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새로 나온 예쁜 휴대전화를 갖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안달하는 여고생이나, 더 나이 들기 전에 근사한 브랜드 아파트에 입성하려 동동거리는 주부나 그 초조함의 본질은 같다.

그 초조함이 커지면 커질수록 누군가의 주머니는 털리고 누군가의 주머니는 채워진다. 돈을 쓰는 것이야말로 그런 초조함을 해소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졸업, 입학,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를 비롯한 각종 ‘데이’마다, 연애 시작한 지 며칠 되는 날마다, 각종 기념할 만한 ‘꺼리’마다, 거리마다, 텔레비전 화면마다, 인터넷 화면 배너 광고마다 이날을 특별하게 보내라는 외침이 고래고래 들려온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런 날들을 특별하게 보내지 못하면 당신은 무능력자, 왕따에 아무런 추억도 없는 사람이라는 노골적 속삭임이 숨어 있다.

기념할 만한 일이 있어 기념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념일을 잘 기념하지 못하면 남보다 뒤처지는 것 같은 초조함이 기념일의 진짜 의미를 삼켜 버린다. 알몸 뒤풀이로 문제가 된 중학생들도 특별히 어린 악당들이라서가 아니라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아이들이었던 게 아닐까. 뭔가 근사한 일을 하고 근사한 선물을 주고받아야 그날이 특별해지니 아이들은 알몸으로 뒤풀이를 하고, 어른들은 무슨 날 기념하려 돈 쓰느라 허리가 휜다.

그 아이들을 야단하고 말세라고 개탄하기보다는 기념일이 기념할 것들을 잡아먹는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매일매일 특별한 날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른의 줏대가 아닐까 싶다. 일단, 지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을 기념할 이유는 충분하니까.

김현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