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아들아”… ‘올림픽 5수’ 이규혁 어머니 이인숙씨

입력 2010-02-25 17:43


안타까운 모정과 돌아온 아들의 고백

‘보면 안 되는데, 보면 안 되는데….’

어머니는 속으로 되뇌었다. 조금 더 참았어야 했다. 그간 어머니는 항상 아들의 경기를 볼 수 없는 곳에서 시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선전을 기원하며. 그리고 가족의 전화를 받고 경기 결과를 알았다. 14년 동안 늘 그랬다. 근데 기다려도 전화가 없다. 초조했다. 서울 보문동 자택으로 돌아와 떨리는 마음으로 TV를 켰다. 그 순간 14년 전 그날이 머릿속을 스쳤다.

14년 전, 그날

1996년 2월. 중국 하얼빈 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아들은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직전 열린 아시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 1500m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보려고 경기장을 찾았다. 하지만 아들은 웬일인지 제대로 얼음을 지치지 못했다. 8위였다. 노메달.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다”는 어머니는 이후 아들의 경기를 보지 않았다.

지난 16일 오전 10시30분, 2010년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500m 1차 경기는 이미 끝났어야 했다. 진행이 늦어진 건 정빙기 고장 때문이었다.

“아 정빙기 고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네요.” 해설자의 목소리가 TV 스피커를 타고 어머니 귓속을 파고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경기가 지연되면 나이 많은 우리 애가 체력적으로 불리할 텐데….’ 어머니는 질끈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거실을 서성였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아들이 출발선에 섰다. 총소리가 울렸다.

피는 못 속인다

“첫 아이를 뱃속에 가진 채로 선수들을 가르쳤죠.” 어머니는 출산 1주일 전까지도 선수를 훈련시킬 수밖에 없던 피겨 국가대표 코치였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는 맡길 데가 없어 얼음판에 데리고 다녔다. “실내 스케이트장도 없을 때에요. 논두렁 물 얼려서 스케이트 타던 그런 스케이트장이죠. 그냥 놀라고 풀어놨어요.”

아들은 서울 리라초등학교에 갔다. “그 학교는 전교생에게 의무적으로 스케이트를 타게 했어요. 4학년 때였나? 학교 전체에서 1등을 했더라고요. 따로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본인도 좋아하고 소질도 있어 보여서 운동을 시키기로 했죠.” 아들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가 됐다.

사람들이 ‘피는 못 속인다’고 했다. 어머니 이인숙(54·피겨 국가대표 출신), 아버지 이익환(64·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 동생 규현(30·피겨 국가대표 출신)씨 모두 엘리트 빙상인 출신이다.

장남은 신통했다. “91년 열세 살 때 국가대표가 된 이후 한국신기록 엄청 세웠죠. 97년 11월엔 한국 빙상 사상 처음으로 1000m 세계기록을 깼고, 2001년엔 1500m 세계기록도 세웠죠.” 아들 자랑에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아들은 이 모든 걸 혼자 해냈다. “운동하면서 힘들 땐 엄마인 저에게 가장 의지하지만 절대 뭘 도와달라거나 하지 않아요.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강해서 스스로 해결하는 스타일이에요.”

아들의 이런 성격이 바쁜 엄마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씨는 피겨 국제심판 등으로 활동 중이라 스케줄이 빡빡하다. “아들이 어머니 음식 중 좋아하는 게 뭔가요?” 멋쩍은 듯 웃는다. “제가 음식을 해준 적이 없어요. 외할머니 음식을 좋아해요.”

다섯 번째 올림픽

-올림픽, 한 번 더 출전하면 어떨까요?

“아유 난 이젠 그만했으면 좋겠어.”

23일 서울 잠실동 국민생활체육 전국스케이팅연합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씨는 여느 어머니보다 강해보였다(이씨는 연합회 회장이다). 하지만 아들 얘기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국가대표 되고 20년 동안 올림픽 메달을 그렇게 바라왔는데. 나야 메달 못 따도 괜찮지만 지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지 내가 아니까….” 시종 웃던 얼굴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매번 아깝게 메달을 놓쳤던 아들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1000m에서 0.05초 차이로 4위에 그쳤다. 4번째 올림픽 실패. 슬럼프가 찾아왔다. 모두가 은퇴를 예상했다. 하지만 아들은 악을 쓰며 다시 일어섰다. 이씨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원래 육식 체질이에요. 식구들이 다 운동을 해서 고기를 주로 먹었죠. 근데 4년 전부터 채식으로 바꾸며 체중 관리를 했어요. 가벼워야 빨라진다고. 외국 선수들이 식이요법 하는 걸 보면서 근육량만 늘린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거예요.” 아들은 스스로 깨우친 뒤 혼자 식단을 연구했다. 외할머니 원순남(77)씨는 “이만했던 허벅지가 요만해졌다”며 양손으로 손자의 얇아진 허벅지를 묘사했다.

식이요법은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은퇴까지 고민했던 아들은 2007, 2008년 국제빙상연맹(ISU)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했다. 이듬해 경기 중 넘어지며 대회 3연패를 놓친 게 아쉬울 뿐이었다. ‘제2의 전성기’라는 말까지 나왔다. 모든 게 완벽해보였다. 그런데….

비운의 황제 … 회한과 고백

“첫 코너에서 저만 아는 실수를 했어요. 느린 화면으로만 봐야 알 수 있는 그런 실수. 거의 하지 않는 실수인데…. 중심을 제대로 옮기지 못해 움찔했죠.”

23일 귀국해 단독 인터뷰에 응한 이규혁(32)은 지난 16일 경기 당시를 힘들게 기억해냈다. 500m 단거리에서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500m는 100분의 1초, 때론 1000분의 1초로 순위를 가린다. 첫 코너에서의 실수로 이규혁은 속도를 끌어올리지 못했다.

“서른 너머까지 선수 생활을 한 사람은 있지만 세계적 수준이었던 선수는 거의 없다”고 빙상인들은 입을 모아 이규혁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는 “나이를 절감했다”고 했다.

“캐나다에 도착한 날 ‘안 되겠다’는 걸 느꼈어요. 몸 상태를 대회에 잘 맞춘다고 했는데 와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어릴 때 하지 않던 ‘짓’도 서른이 넘어서 했다. 500m 경기 전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원래 시합 전에 연락하지 않는데, 이번은 진짜 너무 떨렸어요.”

-정빙기 고장이 가장 컸나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떨림은 어느 대회나 다 있어요. 이번은 달랐어요. 긴장감 이겨내는 것도 실력인데, 그런 것들이 어린 후배들과 차이가 났어요. 후배들은 긴장감을 잘 버티는데 전 못 견디겠더군요. 체력이 달렸어요. 올림픽 기간 내내 정말이지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완전히 지쳐버렸어요. 캐나다에 도착하면서부터 긴장이 극에 달했는데 그 긴장 속에서 체력 유지를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미련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말로는 ‘준비를 많이 했다’ 이 한마디잖아요. 근데 그게요(한숨). 진짜 엄청난 거거든요. 자는 시간, 먹는 거, 만나는 사람까지 다 통제해가면서 4년을 준비한 거예요. (하늘을 잠깐 쳐다보며)그걸…(한숨).” 인천국제공항 야외 주차장에서 동생 차에 오르려다 이규혁은 말을 맺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는 내심 ‘한 번 더’를 바라는 주위의 기대에 간결하게 답했다. “올해 운동을 많이 해놓아서 사실 내년까지는 별 노력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올 겁니다. 올림픽에도 한 번 더 나갈 순 있겠지만 메달권은 아닐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는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억울하고 분하다는 심정이 그의 표정과 행동에 담겨 있었다. 이 분노가 이규혁을 어떤 선택으로 이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메달’ 아닌 것에도 올림픽의 의미가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이가 바로 이규혁이라는 점이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