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미녀 타짜’에게 당했다… 광주광역시 ‘7인조 사기도박’ 사건의 재구성

입력 2010-02-25 19:42


국방색 담요에 최병호(가명·50) 사장이 화투 ‘송학(1)’과 ‘비(12)’를 내려놨다. 패 돌리던 박애주(51·여)가 “어머! 최 사장님, 이 판 먹겠네∼”하며 콧소리를 낸다. 판돈은 300만원이 넘었다. ‘월남뽕’에서 1과 12는 최강의 패다.

월남뽕은 화투를 1인당 2장씩 돌린다. 당신에게 흑싸리(4)와 단풍(10)이 왔다고 하자. 그 두 장을 바닥에 펴면 패를 한 장 더 준다. 세 번째 화투가 4와 10 사이면 당신은 베팅한 돈만큼 판돈에서 가져가고 4 이하, 10 이상이면 베팅한 돈을 잃는다.

화투 숫자는 1부터 12까지.

‘먹을’ 확률이 가장 높은 1과 12가 최 사장에게 왔다.

6명이 치는데 먼저 패를 받은 5명이 잇따라 먹지 못해 판도 크다. 그는 계산을 했다.

‘화투 48장에서 5명이 3장씩 사용했고 내 패 2장 빼면 남은 건 31장(48-17). 송학과 비는 모두 8장인데 2장이 바닥에 있고 그동안 3장이 사용되는 걸 봤으니 남은 건 3장(8-5).’ 이번에 송학이나 비가 나올 확률은 31분의 3, 반대로 먹을 확률은 31분의 28. 승산은 90% 이상이다.

“아도!” 최 사장이 외쳤다. 최대 베팅 한도인 판돈만큼 걸겠다는 뜻. 박애주가 남은 화투 31장 중 맨 윗장을 치켜들더니 담요에 내리쳤다. 비다. 10%도 안 되는 확률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 최 사장이 베팅한 300만원은 고스란히 판돈에 묻혔다.

무조건 먹었다고 생각해 “아도”를 외칠 때마다 확률은 무의미한 숫자가 되곤 했다. 지난해 11월 5일 광주광역시 송산유원지 한적한 식당에서 그는 3시간30분 만에 이렇게 1500만원을 잃었다.

도박판 설계자

“실례합니다. 최병호 사장님 계신가요?” 광주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최 사장 사무실에 지난해 11월 2일 여자 두 명이 찾아왔다. 박애주와 이해인(45)이라고 했다.

“○○횟집 사장님 소개로 왔는데….” 가끔 직원들과 회식하러 가는 ‘○○횟집’은 최 사장의 고교 동창이 운영한다. “좋은 땅 있으면 투자 좀 하려고요.”

이렇게 찾아오는 손님은 많다. 보통 몇 가지 매물 설명 듣고 “생각해 보겠다”며 돌아가면 끝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흘 후 “땅 보러 가자”면서 다시 왔다.

박애주의 SM5 승용차로 전남 곡성 땅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이해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알았어, 언니. 금방 갈게”하더니 “최 사장님, 계모임 날인데 같이 가서 점심이나 드세요”라고 했다.

최 사장이 사양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차를 몰아 간 곳이 송산유원지다. 식당에선 “언니”라 불린 고모(53)씨와 40대 초반 A씨, 30대 중반 B씨 등 세 여자가 곗돈이라며 지폐 다발을 세고 있었다.

맥주 곁들여 식사를 마치자 박애주가 “심심한데 고스톱이나 치자”며 담요를 깔았다. 구경하던 최 사장을 끌어들이더니 “시간이 없다”며 종목을 월남뽕으로 바꿨다.

피해자는 또 있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광주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최 사장 외에 이들 여자와 화투 친 두 명을 더 찾아냈다. 수산물업체 김철민(가명·45), 죽세공업체 이진수(가명·47) 사장. 두 사람에겐 11월 초 휴대전화로 이상한 문자메시지가 왔다. ‘남들 다 있는 애인도 없고. 언니, 나 외로워….’

이렇게 생각했다. ‘여자가 신세타령하다 전화번호 잘못 눌렀군.’ 김 사장과 이 사장은 호기심이 발동해 메시지 주인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 모두 B씨가 받았다(두 사람은 나중에 경찰에서 B씨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특출하진 않아도 상당한 미모에 사근사근한 스타일”).

이후 벌어진 상황은 같다. 몇 차례 통화하며 잡담을 나누다 “식사나 한번 하자” 했고, 한두 번 만나니 B씨가 “친구 집에 놀러 가는데 같이 가자”며 광주 동림동 아파트로 데려갔다. 그곳에선 나머지 여자 네 명이 화투를 치고 있었다.

‘정 마담’의 유혹

송산유원지 식당은 택시도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다. 차편이 없어 화투판 끝나기를 기다리던 최 사장 지갑엔 몇 만원밖에 없었다. 월남뽕이 시작되자 금세 돈을 다 잃은 이해인이 “아는 오빠에게 돈 좀 빌려야겠다”며 전화를 했다.

5분도 안 돼 장모(57)씨가 식당에 들어서더니 현금 다발을 내밀었다. 이해인은 최 사장에게 “지루하실 텐데 같이 하세요”라며 100만원을 빌려줬다. 가끔 친구들과 화투를 쳤고, 월남뽕도 해본 적 있는데 돈을 빌리기 무섭게 다 잃었다.

장씨는 아예 눌러 앉아 ‘꽁지(도박판에서 돈 빌려주는 사람)’ 노릇을 했다. 지난 4일 광주에서 만난 최 사장은 “차용증 써가며 100만원씩 빌리다 500만원씩 두 번 더 빌려 다 잃었다”고 했다.

-빌린 돈은 갚았나요?

“다음날 이해인이 미안하다면서 전화했길래 ‘빌린 돈 갚았느냐’고 물으니 바로 송금했대요. 그래서 저도 그날 송금했어요.”

-그 뒤로도 연락이 왔나요?

“나흘 후(11월 9일) 박애주가 전화했어요. 집에 킹크랩 해놨으니 먹으러 오라고. 동림동 아파트(김·이 사장이 갔던 곳과 같은 집)로 가니까 그 여자들 다섯이 화투치고 있더군요.”

-그래서요?

“제일 젊은 여자(B씨)가 내 옆에 바짝 붙더니 술 따라주며 비위를 맞추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려 버렸어요.”

이날 저녁 8시30분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최 사장은 2900만원을 잃었다. 역시 차용증을 썼고 장씨에게 송금했다. 11월 18일엔 김 사장이 6시간 만에 2600만원, 12월 3일엔 다시 최 사장이 3600만원, 12월 26일엔 이 사장이 2800만원을 날렸다. 세 사람이 잃은 돈은 모두 1억3400만원이다.

게임의 법칙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었나요?

“세 번 잃고 나니 당했다 싶었죠. 오야(패 돌리는 사람)를 돌아가며 하는데, 내가 크게 잃은 판마다 오야가 박애주였어요. 월남뽕이 기술(속임수) 쓰기 제일 쉽다더군요.”

-잃은 돈이 적지 않은데.

“더 이상한 건, 그렇게 잃어도 큰일 났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정신이 좀 몽롱했죠.”

최 사장이 세 번째 화투판에서 빌린 돈을 갚지 않자 장씨가 사무실로 찾아와 흉기를 들이대며 협박했다. 마침내 경찰에 신고했다.

탐문수사 결과 남자 2명, 여자 5명의 ‘라인계(사기도박 조직)’였다. 총책은 ‘언니’ 고씨, ‘선수(속임수 기술자)’는 박애주. 둘 다 도박 전과가 있고, 이 지역 라인계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나머지 여자 세 명은 바람잡이다. 특히 B씨는 ‘미인계’에 활용됐다. ‘꽁지’ 장씨는 이해인의 남편이었다. 다른 남자(53)는 각종 심부름을 했다.

경찰이 사건의 윤곽을 잡아가던 올 1월 18일 아침. 장씨와 이해인, 박애주가 광역수사대 사무실에 들어섰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세 사람은 도박을 했지만 사기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기 혐의를 적용할 증거가 없었다. “정신이 몽롱했다”는 최 사장 모발 검사에선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경찰 관계자는 “요즘 20만∼30만원에 거래되는 환각제 ‘물뽕’은 약물반응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장씨와 박애주만 ‘사기’ 대신 ‘상습도박’ 혐의로 구속했다. 부부란 이유로 이해인은 영장이 기각됐다. 고씨 등 나머지 일당은 잠적했고, 자수한 셋에겐 모두 변호사가 선임됐다. 수사팀 관계자는 “라인계의 전형적인 도마뱀 꼬리 자르기”라며 “구속자도 기껏 징역 1∼2년일 것”이라고 했다.

최 사장은 이들에게 당한 과정을 털어놓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횟집 하는 친구는 이 여자들에게 날 소개한 적이 없대요. 확인전화 한 통만 해봤어도…. 나는 내가 똑똑한 줄 알았어요.”

광주=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