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성기] 대못질과 막말

입력 2010-02-24 18:22


“한나라당은 아직 세상 변한 줄 모르고 독선과 자만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임기 말까지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및 혁신도시 건설을 위한 토지 매입과 착공을 서둘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9월 제주혁신도시 기공식에서 “내 임기 안에 첫 삽을 뜨고 말뚝을 박고 대못을 박아버리고 싶은 것”이라고 밝혔다. 빨리 돈을 풀어 토지 매입을 마치고 주민 이주를 단행하면 차기 정부도 세종시 등의 건설 규모와 일정을 변경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었다.



고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명박 정부가 정운찬 총리를 앞세워 세종시 수정안을 제시하자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세력들이 일제히 반발했고 세종시 부지인 충남 연기군과 공주시 일대 이주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주민들은 정부부처를 이전하겠다고 고향에서 쫓아내더니 이제 와서 부처 이전을 안 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게다가 한나라당 내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지지하는 친이계와 원안 플러스 알파를 주장하는 친박계가 정면으로 격돌, 정치적 공방이 치열하다.

당초 참여정부의 수도 이전 구상은 물론 변형된 수도 분할 계획에도 반대해온 보수 여론은 현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제시하자 야당과 지역주민 설득하는 일이 큰 과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청와대가 당연히 당정 간의 충분한 교감을 갖고 수정안을 마련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안 추진이 가시화하면서 야당 반발은 그 다음이고 한나라당 집안싸움부터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친이계는 수도 분할의 비효율을 들어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수정안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이에 맞서 친박계는 신뢰의 문제를 제기했다. 세종시를 당론으로 채택했고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약속했는데 이제 와서 부처 이전을 백지화하려는 것은 국민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정당 안에서 당연히 여러 의견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수렴하는 것도 민주적 절차의 일부이므로 효율과 신뢰를 각각 강조한 찬반론은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논쟁이 거듭될수록 친이-친박계 간 공방이 험악하게 치달아 차기 대통령 선거 구도를 겨냥한 정치적 힘겨루기로 변질되는 느낌이다. 그것도 편협한 술수와 막말을 가리지 않는 저급한 투쟁으로 국민에게 비친다.

집권여당이 중지를 모아 국정 운영에 힘을 보태주기는커녕 이번 기회에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하거나 결집력을 과시해 당내 구도를 자파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계파별 정략에 몰두한다는 비판이 대다수 국민의 시각이다. 여기에 국민이 차마 듣기에도 민망한 시정잡배들의 욕설까지 당내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와 갈 데까지 가보자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여론을 외면한 채 판단력이 흐려져 자만에 빠진 정당이 가는 길은 뻔하다. 역대 주요 선거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김대중 정부가 레임덕에 빠지면서 목에 힘이 들어간 한나라당 모습이 딱 그러했다. 그때 이회창 총재는 ‘미래 권력’인 동시에 ‘현재 권력’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옷로비 사건 이후 각종 스캔들에 휩쓸려 권력누수 현상이 빨라지자 ‘야당 대통령’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내에서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어떻게든 이 총재에게 잘 보여 한자리 차지하려는 인물들이 거들먹거렸다.

친이-친박계가 첨예하게 대립한 지금 구도는 이 총재가 당권을 확실하게 장악했던 때의 한나라당과는 외형상 판이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세상 변한 줄 모르고 독선과 자만에 빠져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수의 우위를 내세워 당내 판도를 일방적으로 몰아가려는 세력이나, 비판과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측 모두 유권자의 눈엔 오만하게 보인다.

악다구니를 퍼붓는 집안싸움은 한나라당의 부정적 이미지와 분열을 키우는 대못질과 다를 게 없다. 2002년 대선에서 선거운동은 제쳐두고 이회창 후보 눈도장이나 열심히 받으러 다니던 구시대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의 빈축을 사 57만표 차 패배에 일조했음을 한나라당은 잊지 말아야 한다.

김성기 카피리더 kimsong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