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오승 (8) 학생회장 직선제 관철… 원칙 고수에 ‘석고상’ 별명
입력 2010-02-24 17:32
1980년 8월 서울 경희대로 옮긴 뒤 나는 법과대학에서 주로 민법총칙과 채권법을 가르쳤다. 경제법은 선택과목으로 강의했다.
나는 가능하면 열심히 준비해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학생 성적은 엄격히 평가했다. 어떤 학생은 “권 교수님은 다 좋은데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한 학생은 내게 민법총칙을 여섯 번이나 들었다. 학기말 시험에서 커닝을 하다 발각된 그 학생은 연구실로 찾아와 이번이 민법총칙 다섯 번째라고 설명했다. 군복무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졸업반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학점을 취득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하게 된다고 사정했다. 더구나 군복무 중에 허리를 다쳐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라며, 졸업을 못하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통곡했다.
나는 되레 그 학생을 야단 쳐 돌려보냈다. “사나이가 그렇게 나약해서 어디에 쓰겠느냐. 그만한 일로 죽을 것 같으면 아예 죽어버려라.”
바로 방학이어서 그 학생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학 내내 걱정을 했다. 내가 너무 심하게 야단을 친 것은 아닌지, 혹시 그 학생이 정말 잘못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중 그 학생이 편지를 한 통 보내왔다.
“처음에는 많이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교수님이 바라시는 게 무엇이며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저 잘되라고, 성실하라고 한 것이지 저를 미워서 그런 게 아닌 것을 잘 압니다. 장차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제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지를 읽고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도 답장을 썼다. 그 학생은 다음 학기에 민법총칙을 여섯 번째로 수강해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경희대로 옮겨 온 지 6개월 만에 나는 법학과 학과장이 됐다. 법과대학의 학사 행정과 학생 지도도 총괄했다. 당시에는 학교 행정에 불합리한 요소들이 많았다. 군사정부가 학교의 행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회 대표를 대학이 지명했다. 이렇게 뽑힌 학생회장은 일반 학생들로부터 지지를 못 받았고, 지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교수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그 다음해부터 학생회장을 학생들이 직접 선출하게 했다. 많은 반대가 이어졌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법과대는 학원 소요의 진원지였다. 학교가 조용하려면 법과대부터 평온하게 해야 했다. 이를 설득시켜 직접 선출을 강행했고, 실제 학원 소요는 가라앉았다.
원칙에 따라 처리하려는 내 모습이 학생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원칙주의자로 비쳤던 모양이었다. 1982년 가을 설악산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등반을 마친 우리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모처럼 마음을 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학생이 갑자기 소리쳤다. “선생님, 선생님, 석고상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설악산에 어느 석불이 그러나 보다 싶어 “어디?”라고 물었다. 그러자 학생들이 일제히 박장대소했다.
한 학생이 나의 이마를 가리켰다. “여기요.”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석고상과 같은 교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가슴 따뜻한 교수라는 것을 학생들이 알고 장난을 친 것이었다. 학생들은 그때부터 나를 교수님이 아닌 선생님으로 불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