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제 먼저 아니 오고 매화 향 먼저 가라하네… ‘섬진강의 봄’

입력 2010-02-24 19:29


한반도의 봄은 빛과 볕의 고장인 전남 광양(光陽)에서 태어난다. 고로쇠나무의 수관을 흐르는 수액엔 백운산의 초록꿈이 녹아있고, 섬진강변을 수놓은 홍매화의 터질듯 부푼 꽃망울엔 춘심을 유혹하는 은은한 향이 스며있다. 경칩을 앞두고 봄기운이 완연한 광양으로 봄마중을 나가본다.

◇백운산 고로쇠

백운산이 섬진강보다 먼저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따스한 햇살이 갈색으로 바짝 여윈 산기슭을 어루만질 때마다 백운산은 땅속 깊은 곳에서 심호흡을 한다. 그때마다 실핏줄 같은 수관을 흐르던 고로쇠나무 수액이 두꺼운 껍질을 뚫고 방울방울 이슬처럼 맺힌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호남정맥이 남해에 가로막혀 천리여정의 마침표를 찍은 백운산(1218m)은 우리나라 최대의 고로쇠나무 수액 산지. 생육에 필요한 일조량과 수량이 풍부해 예로부터 백운산에서 채취한 고로쇠나무 수액은 으뜸으로 꼽혔다.

수액 채취가 가능한 고로쇠나무는 동곡계곡을 비롯해 성불계곡, 어치계곡, 금천계곡 등 백운산의 4대 계곡에 자생하는 4만2000여 그루. 그 중에서도 백운산 정상과 따리봉 사이의 한재고개에서 발원한 10㎞ 길이의 동곡계곡에서 가장 많은 수액이 채취된다.

단풍나무의 일종인 고로쇠나무는 백운산 해발 600∼900m 고지에서 자생한다. 고로쇠나무 수액은 날씨가 쾌청하고 일교차가 15도 이상일 때 수간압에 의해 생성되는 약수로 채취 시기는 경칩(3월 6일)을 전후한 한 달. 수령 10년 이상의 고로쇠나무에 직경 1㎝ 가량의 구멍을 뚫고 고무호스를 꽂으면 링거액처럼 수액이 방울방울 흘러나와 싱그러운 맛의 약수로 거듭난다.

칼슘 칼륨 마그네슘 등 미네랄 성분이 물보다 40배 많아 골다공증 신경통 위장병 변비 피부미용 등에 좋다고 알려진 고로쇠나무 수액에 대한 기록은 110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백운산에서 수도를 하던 통일신라의 풍수지리가인 도선국사가 고로쇠나무의 부러진 가지에서 떨어지는 수액을 마시자 곧바로 무릎이 펴졌다고 한다. 뼈에 이롭다고 골리수(骨利水)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광양시는 타지역 고로쇠와 차별화를 꾀하고 고로쇠 채취 농가의 소득 증대를 위해 올해 ‘광양 백운산 고로쇠 약수 영농조합법인’을 구성하고 옥룡면, 봉강면, 진상면, 다압면 등 4개면 8개리에 설치한 정제시설에서 고로쇠를 정제하고 약수통 주입구에는 실링을 부착한다. 또 약수의 채취와 유통 전 분야에서 자체 기준을 정해 법인 차원에서 엄격한 관리를 통해 출하한다.

광양시는 내달 6일 옥룡면 동곡리 일대에서 ‘제30회 백운산 고로쇠 약수축제’를 개최한다. 약수 합수제와 관광객 대상 무료시음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고로쇠나무 수액 가격은 18리터 1통에 6만원. 광양시청 홈페이지(www.gwangyang.go.kr)의 ‘백운산고로쇠약수제’ 메뉴를 클릭하면 판매농가의 전화번호가 나온다.

◇섬진강변 매화

우수(雨水)를 지나자 전라도와 경상도를 흐르는 섬진강이 여기저기서 매화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팝콘이 터지듯 함박웃음을 짖듯 섬진강변을 수놓은 매화가 등고선을 그리며 시나브로 백운산 자락을 오르기 시작했다.

홍쌍리 여사의 청매실농원으로 유명한 광양시 다압면의 매화마을은 우리나라 최대의 매화단지. 본래 섬진마을이었으나 매실 명인 홍쌍리 여사가 평생을 바쳐 돌무더기인 백운산 산비탈을 매화동산으로 일구면서 매화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매화는 섬진교 서단에서 남도대교 서단까지 섬진강과 나란히 달리는 861번 지방도로 주변에 집중적으로 피어있다. 그 중에서도 3000여개가 넘는 장독과 대나무숲, 그리고 섬진강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청매실농원의 매화밭이 가장 아름답다.

봄 햇살에 수줍은 광택을 자랑하는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옆 오솔길은 상춘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책로. 해묵은 청매화 홍매화 백매화가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리는 산책로를 걸어 전망대에 오르면 매화나무 사이로 거대한 자연석에 매화를 주제로 한 시를 새긴 문학동산이 드넓게 펼쳐진다. 문학동산엔 벌써 청보리가 발목 높이로 자라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매화밭 입구에 위치한 초가집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촬영한 세트장.

올해 새롭게 선보이는 청매실농원 전망대는 청매실농원은 물론 매화마을과 섬진강, 그리고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튼 하동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강 건너 북쪽이 화개장터고, 멀리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고향인 평사리도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섬진강 모래톱만큼이나 하얀 시멘트길이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지리산 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풍경도 이색적이다.

청매실농원 뒤편의 대숲길은 영화 ‘취화선’을 촬영했던 곳. 섬진강 봄바람에 사각거리는 댓잎 소리가 심신을 청량하게 씻어준다. 부드러운 촉감의 흙길과 해발 고도가 높아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나무, 냉이를 비롯한 봄나물, 그리고 온갖 야생화들이 이곳에서 봄꿈을 꾸고 있다. 어른 팔뚝 굵기의 대나무 사이로 난 산책로도 올해 처음으로 선보인 명물.

매화꽃은 봄비 내리는 날에 더욱 청초하다. 하얀 꽃잎에 맺힌 빗방울이 옥구슬처럼 청보리밭을 구르고 섬진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솜사탕처럼 지리산 자락을 휘감는다. 밤에 보는 매화꽃도 운치 있다. 백운산 너머로 해가 지고 청매실농원의 하늘이 암청색으로 물들면 백매화가 하얗게 빛난다. 이어 어둠에 묻혔던 섬진강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내면 달빛에 젖어 더욱 하얀 매화가 은하수가 내려앉은 듯 백운산 자락을 수놓는다.

광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