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김주열과 3·15의거

입력 2010-02-23 17:49

영국 ‘더 타임스’는 1951년 10월 1일자 사설에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썼다. 부끄럽지만 당시로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피란수도 부산에선 권력 연장을 위한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주장으로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었다. 부패, 강권정치 등으로 이미 위기에 몰린 이 대통령은 이듬해 6월 국회에서 치러질 간선제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자 직선제 카드를 드밀었다.

야당은 물론 자유당 내에서조차 반대가 적지 않자 이 대통령은 반대 의원들에게 용공 혐의를 씌워 구속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52년 7월 4일 경찰과 군대가 국회를 포위하고 국회의원들을 감금한 가운데 기립투표를 통해 직선제 개헌안은 통과됐다. 쓰레기통과 장미는 역시 무관했다.

52년 8·5 직선으로 연임에 성공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등 입맛대로 헌법을 고쳐 56년 대선에서도 승리한다. 하지만 국민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60년 3·15 대선 당일 마산에서는 대대적인 부정선거 반대 데모가 벌어졌고 경찰이 발포해 많은 희생자가 났다. 바로 마산 3·15의거다.

마산 3·15의거는 한 젊은이의 처참한 죽음을 계기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은 3·15의거에 참가한 뒤 행방불명 된 지 28일 만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앞바다에 주검으로 떠올랐다. 그의 오른쪽 눈에는 길이 20㎝의 미제 최루탄이 깊이 박혀 있었다.

경찰의 광포함과 시신 유기에 이르는 실체가 4월 12일자 부산일보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3·15의거는 이승만 정권 타도의 불씨를 키우며 4·19로 이어졌고 결국 이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했다. 한국 민주주의에서 쓰레기통과 장미의 역설적 관계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에도 권력은 한국 민주주의를 좀먹어갔지만 그 때마다 민주화 열사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죽음으로 맞서 저항의 물꼬를 텄다. 박정희 군사독재 때 이른바 재야(在野) 그룹을 낳았던 전태일,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박관현, 6월항쟁의 봇물을 튼 박종철 등.

행정안전부가 마산 3·15의거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3월 15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고 22일 밝혔다.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3·15의거, 4·19혁명의 뜻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어찌되고 있나. 장미는 계속 피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시 이 시대의 선구자적인 열사를 기다려야만 하는가.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