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문일] 從北주의 기원과 빨치산

입력 2010-02-22 21:10


“빨치산 미화는 進步주의가 王朝 이데올로기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

전교조 소속 교사로서 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 추모 행사에 참석한 김형근씨에 대해 전주지방법원 진현민 판사가 무죄 판결을 내린 일은 일과성(一過性) ‘튀는 판결’이 아니다. 빨치산이 공공연히 ‘통일 열사’로 미화되고 그와 관련된 위법행위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 배경에는 우리 현대사에 깊이 뿌리박은 북한추종주의, 종북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6·25전쟁 발발을 전후해 지리산 등 남부 산악지대에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한 빨치산은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다. 전쟁 뒤의 사회는 북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낙오해 괴멸된 집단에 대해서까지 의미를 따질 만큼 여유 있지 않았다. 1980년대 말 민주화 대세 속에서 나온 이태(李泰)의 수기 ‘남부군(南部軍)’은 내부자의 시선으로 빨치산이 무엇을 위해 싸웠고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생생하게 전했다. 국군과 경찰에 쫓기며 춥고 배고픈 극한 상황을 버티는 이들의 이야기는 꾸밈과 과장이 없는 인간극장(人間劇場)으로서 읽는 이를 매료시켰다. 이를 계기로 많은 빨치산 수기와 소설이 나왔지만 독자에게 끼친 영향력에서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란 소설이 단연 압도했다.

빨치산의 시대로부터 60년이 흐른 지금은 그들에게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대의명분이 무엇이고, 전략과 전술이 어떠했건 분명한 것은 그들은 선택을 잘못한 사람들이다. 그 선택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건, 지휘자를 믿고 따른 것이건 간에 그들은 북으로부터 버림받고 막다른 골목에서 희망 없는 싸움을 하다가 소멸되었다. 후하게 말한다면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렸다’는 정도겠는데 그런 사람은 동정할 일이지 찬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얼굴’로 조심스럽게 부활한 빨치산을 ‘전사(戰士)’와 ‘열사(烈士)’로 바꿔놓는 데 결정적 역할은 한 것이 100만부 이상 팔렸다는 ‘소설 태백산맥’이다. 박헌영 등 남로당 일파가 북에서 간첩 혐의로 숙청되자 지리산의 빨치산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역사선택’이라는 말로 북한의 숙청을 설명한다. 박헌영 등이 전쟁을 잘못 지도한 책임을 지고 역사 앞에서 선택을 했다는 뜻이다. 궤변(詭辯)도 이런 궤변이 없다. 북한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기발한 논리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다”는 시(김수영 ‘풀’)는 이런 경우를 말함이라 하겠다. 종북사상의 원형(原型)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런 종북주의가 빨치산의 실상을 왜곡했다. 북한은 휴전협정에서 전쟁포로는 교환하면서도 지리산 빨치산에 대해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둔 것이다. 북한으로 거두어들여 봐야 남로당계의 힘이 될까 우려했다는 분석도 있다. 소설은 빨치산들이 왜 몰이꾼에 쫓기는 토끼처럼 비참하게 죽어야 했는지를 궤변으로 가렸다.

왜곡된 빨치산 모습은 그들과 혈연으로 매인 사람들에게 지지 받는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비참한 운명을 역사의 이름으로 위로해 자신의 가계(家系)까지 미화하려는 것이다. 반정부 집회마다 한복 차림으로 앞줄에서 구호를 선창하고 뒤로 빠지는 인사들 중에도 빨치산과 관련된 가족사를 가진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좌파운동의 역사에는 북한식을 거부하고 자주 노선을 걸은 사람들이 있었다. ‘혁신계’ 정치인들이다. 초대 내각의 농림장관 조봉암이 대표적 인물이다.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그가 요즘의 진보를 본다면 그 종북성에 크게 놀랄 것이다. 혁신계는 일부가 전두환 정권에 회유되면서 해체된다. 시대의 격변에 도태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만약 이들의 맥이 건재했더라면 종북 진보주의가 지금과 같이 발호(跋扈)하는 상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북한체제는 조선왕조보다도 후퇴한 전제정이다. 그런 체제를 맹종해서인지 종북주의자들의 용어 또한 왕조적이다. 빨치산을 미화하는 열사란 말이 얼마나 봉건적인가. 조선시대 남편이 죽어도 개가하지 않는 부인을 열녀라 불렀다. 명색이 진보라면서 왕조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있으니 참 딱하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