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오승 (6) 무소유 실천 목회자에 끌려 주님의교회 출석
입력 2010-02-22 18:10
대학 입학 전까지 비교적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일예배에는 절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 사회과학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교 행사로 주일 예배에 한두 번 빠지기 시작하다 급기야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것조차 회의가 들었다. 또 점차 우리나라 교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1960, 70년대에는 군사독재 치하였다. 대학은 민주주의 수호 데모로 항상 시끄러웠다. 대학생들은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다양한 학생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내 눈에 우리 교계는 대체로 이러한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개인적인 축복만 중시하는 것 같았다.
가슴은 교회를 찾았지만 머리는 교회를 비판했다. 예배드리며 은혜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설교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었다. ‘논리적이지 않다’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을 수긍할 수 없다’ ‘설교 시간 중에 질문하는 시간도 안 주네’ 등.
나는 설교를 잘한다고 소문난 목사님들을 찾아 주일마다 교회를 떠돌았다. 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그러다 정착한 교회가 서울 잠실 ‘주님의교회’다. 90년 11월 한 고등학교 선배는 주님의교회를 이렇게 소개했다.
“주님의교회는 교회와 목사가 무소유를 실천하는 게 특징이야. 예배당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목사도 집과 통장을 소유하지 않지. 또 헌금의 반을 선교와 구제에 쓰고, 나머지 반을 교회 살림에 사용하지. 대단해, 한번 가볼래?”
아내와 나는 당장 그 다음 주일 주님의교회로 향했다. 강남 YMCA의 4층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인 수는 400여명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타 교회와 다른 참신한 느낌을 받았다.
첫째는 내가 교회 본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성수주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교회를 나갔다. 이 때문에 예배 시작 전에 교회에 도착한 적이 거의 없었고, 항상 지하실이나 교육관 등에서 TV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주님의교회는 700여명 공간이 다 차지 않았다. 매번 늦는 나조차 본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소속감을 갖게 됐다.
또 목사님 설교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이재철 목사님은 미리 준비한 설교 내용을 몽땅 외워 그대로 전달했다. 그때부터 몇 달 동안 아내와 함께 주님의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던 91년 4월 어느 주일날이었다. 목사님은 “신앙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터치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자전거를 뒤에서 살짝만 터치해보세요. 쉽게 올라가지”라고 설명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의 터치를 받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방법이 궁금했다. 그러나 목사님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설교를 끝냈다. 예배가 끝난 후 목양실로 찾아갔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터치를 받을 수 있나요?” 그런데 목사님은 “권 교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터치를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었다. 내 삶 속에서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목사들은 다 저렇게 이야기하는가 보네. 내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계속 교회에 나오게 하려면, 저렇게 말해 두는 것이 좋겠지”라고 생각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