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인생의 비루한 삶 독하게 그렸죠”

입력 2010-02-19 17:58


배지영 첫 번째 소설집 ‘오란씨’ 출간

되다. 독하다.

2006년 중편소설 ‘오란씨’로 등단한 젊은 작가 배지영(35)의 첫 번째 소설집 ‘오란씨’. 청량음료 이름을 따다 붙인 제목과 밝은 형광 오렌지색 책 표지와 달리 ‘오란씨’ 안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우리 사회의 불안과 공포, 사회 가장 밑바닥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비루한 삶을 펼쳐낸다. 공중변소, 개백정, 창녀, 근친상간 등 외면하고픈 현실을 그는 지독하리만치 파고든다.

속도감 있는 문체로 끌고 나가는 이야기는 “이게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거칠고, 질퍽하고, 그래서 슬프고 아프다. 배우 배두나를 닮은 동그랗고 큰 눈이 인상적인 그를 보고 있자니, 저 순한 얼굴 어디서 그렇게 독한 이야기를 뽑아내는지 궁금했다.

“열심히 일해서 얻고 싶은 것조차 없는 사람,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람, 암담하고 어두운 미래가 당연한 현실이라고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많아요. 전 소설은 그런 이들의 삶에 돋보기를 갖다 댐으로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아직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의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는 개인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도태되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니요. 그게 가능하기나 한 말입니까. 행복이란, 그러니까 집 안에 화장실과 목욕탕이 함께 딸려 있는 집에 사는 아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이었습니다.”(‘어느 살인자의 편지’ 중)

소설이 지향하는 세계관을 구축한 데는 대학 졸업 후 수년 간 방송 작가로 일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시사 프로그램 제작을 하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 추방되고 은폐된 부분이 많음을 깨닫게 됐다. 실제 중편 ‘오란씨’의 덤프트럭 운전사나 ‘파파라치-슬로셔터 No. 3’의 파파라치 등은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인물이다.

서울 연희동 모래내 시장 근처에서 보낸 어린 시절, 어렵게 학교를 다니던 학급 친구들에 대한 기억 등도 소설의 자양분이 됐음은 물론이다.

서울 변두리에서도 가장 냄새나고 추한 공간으로 그려지는 ‘오란씨’의 공중변소, 매밋집 등은 이 때 그의 뇌리에 박힌 장소들이다. ‘구원과 희망을 이야기하겠다’는 그의 궁극적 목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종교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소설이 세상에 빛이 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소외된 사람을 바라보고, 빛을 끌어당겨서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 그게 제 문학이 갈 길이라고 생각해요.”

순한 얼굴로 단호하고 섬뜩한 언어를 뱉어내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독한 현실을 피해가지 말라”, “네가 살고 있는 그 익숙하고 친숙한 풍경에 숨겨진 냉혹한 진실을 직시하라”는 주문이다.

연작 ‘슬로 셔터’는 마치 흘러가는 듯한 느낌의 사진 찍는 기법에서 따온 제목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의 틈새를 슬로 셔터라고 생각했고, 그 틈에서 나오는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담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마치 사진을 찍듯 사실을 보여주듯 묘사하려고 노력했어요. 이렇게 살고 있으면 이렇게 써야하고, 독한 건 독하게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물론 조금씩은 달라지겠죠. 현실의 어두움을 드러내더라도 결국 말하고 싶은 건 희망과 온기거든요. 유머, 재미 이런 부분을 확장시켜서 제 소설의 인물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다른 이의 고난에는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세태가 만연한 요즘, “소설은, 활자언어는 달콤한 말로 현실을 마비시키는 게 아니라 각성시키는 일이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이 소설의 세계 안에서 더욱 단단해지길….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