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코너-김명호] ‘新저강도 냉전’
입력 2010-02-18 18:25
#2009년 7월 27일, 워싱턴 1차 미·중 전략경제대화 개막식장.
“산중에 좁은 길도 계속 다니면 큰 길이 되고, 다니지 않으면 곧 풀이 우거져 길이 막힌다.” 개막 연설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은 맹자의 ‘진심(盡心)’ 하편을 인용했다. 양국이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자는 강한 메시지였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사람이 모이면 태산을 옮길 수 있다”는 중국 속담으로 인사를 건넸다.
고사성어 성찬은 이어졌다.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함께 행동해 왔다. 이를 풍우동주(風雨同舟)라 한다”고 중국말까지 섞었다. 중국 측 다이빙궈 국무위원의 얼굴은 아주아주 환하게 펴졌다. 그러면서 오바마의 선거 구호였던 “Yes, we can”으로 화답했다. 당시 언론들은 미국의 간절한 구애에 중국이 받아주는 형국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환심 사기’로 표현한 신문도 있었다.
#2010년 2월 18일, 백악관 맵룸.
오바마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이미 중국 정부는 공개적으로 양국 관계 악화를 경고하며 면담 취소를 수차례 요구했었다. 하지만 백악관 대변인은 “달라이 라마가 국제적으로 존경받고 있고, 티베트 인권을 대변하는 인물이며, 대통령도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고 사전설명을 한 바 있다. 중국 요구를 일축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지난해 달라이 라마가 워싱턴을 방문, 면담을 요청했을 때 오바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중을 앞둔 시점에서 중국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오바마가 달라졌다. 오바마는 연초부터 대만에 64억 달러어치의 무기를 판매하는 계획을 최종 승인했다. 지난해 너무 저자세를 보인다는 비난까지 들어가며 중국을 감싸안던 오바마였다. 달라이 라마와 대만 문제는 중국에 가장 민감한 두 사안이다. 백악관과 국무부는 구글 사태와 관련해 중국을 강력히 비난했고, 상무부와 무역대표부는 중국과 무역분쟁 중이다. 왜 그럴까. 오바마를 화나게 만들고, 중국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만든 이유는 뭘까. 한 고위 외교 소식통은 “엄청난 공을 들였음에도, 중국에게서 별로 얻은 게 없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고 백악관 분위기를 전했다.
그 배경은 국내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 오바마의 머릿속에는 수출과 일자리만 들어 있는 듯하다. 두 단어는 요즘 오바마가 어느 자리에 가도 빼먹지 않고 언급된다. 앞으로 5년 동안 수출을 두 배로 늘려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아시아, 특히 중국을 정조준하고 있다.
중국이 좀 더 미국 제품을 많이 구입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더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위안화 절상 요구다. 그래서 오는 4월 재무부의 의회 제출 보고서를 통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가능성이 점차 번지고 있다. 그러면, 환율 전쟁이다.
그런데 중국은 버티고 있다. 11월 중간선거 패배가 예상되는 오바마는 어떻게든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경제 회복이 필요하다. 자신의 재선을 위해서는 재정적자 1조4130억 달러(2009년 말)를 2012년까지 목표치인 8280억 달러 아래로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수출과 일자리 창출을 내건 것이다. 미국의 강공은 계속되고, 중국의 맞받아치기는 이어질 것 같다.
현재 미·중 관계는 이렇듯 간단치 않게 흐르고 있다. 핵탄두 군비 경쟁으로 상징되는 과거 미·소의 냉전 형태는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대화와 충돌을 반복하며 자국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저강도 냉전’이 이어질 수는 있다.
미·중 사이에 ‘신(新)저강도 냉전’을 자극하는 요소는 도처에 널려 있다. 환율과 무역 불균형을 비롯해 이란 핵, 기후변화, 사이버 전쟁과 세계경제 회복 정책…. 미·중 관계가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반도 안보와 경제는 그 기류에 휘둘릴 개연성이 높다. 그들이 벌이는 ‘신저강도 냉전’ 게임에 미리미리 전략적 레버리지를 확보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전략적 유연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워싱턴=김명호 특파원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