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뛰어야 이동국 골 넣는다”
입력 2010-02-18 17:55
축구 평론계의 히딩크, 존 듀어든… 한국, 월드컵 16강 이렇게 뚫어라
지난해 2월 11일.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은 이란 대표팀과 테헤란에서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을 치렀다. 결과는 박지성의 극적인 동점골로 1대 1 무승부.
“구세주 박지성, 지옥에서 팀을 구했다.”
한국 언론과 평론가들은 일제히 박지성 선수를 치켜세웠다. 그런데 다른 평론이 있었다.
“박지성은 프리미어리그, 아니 전 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볼 소유력을 자랑하는 팀(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로 뛰고 있지만 다른 선수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경기력으로 일관했다.”
글쓴이는 존 듀어든(38). 영국 출신의 프리랜서 기자로 축구전문 사이트 ‘골닷컴’의 아시아 부문 편집장이다. ‘태극전사’ ‘정신무장’ ‘격침’ 등 전쟁용어가 난무하고 애국심을 자극하는 평론이 다수인 한국에서 그는 한국 평론가들이 애써 외면했던 주제로 예리한 칼럼을 쓰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취재 당시 한국과 인연을 맺고 3년 뒤 서울에 정착한 듀어든. K리그 등 한국 축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포털사이트에 연재하는 그의 칼럼은 낯설다. 국내 언론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기성용의 셀틱(스코틀랜드 리그 소속 구단) 진출을 반대했고, 대한축구협회의 군대식 행정처리를 매섭게 질타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 축구 평론계의 ‘히딩크’다.
벽안(碧眼)의 축구 담당 기자 눈에 한국 축구는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지난 10일 동아시아연맹 축구선수권대회 중국과의 경기에서 한국이 대패했습니다. 32년 만에 중국의 공한증(恐韓症)도 깨졌고요.
“중국 수비가 정말 견고했어요. 기술도 좋았고, 분명한 목표도 있었죠. 한국인이 중국의 공한증을 자랑스러워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끝나리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죠. 중국의 성장은 아시아 축구에도 좋은 일입니다.”
-한국 축구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파워, 높은 볼 점유율, 강한 체력입니다. 나쁘진 않은데, 특별한 것도 없어요.”
-한국 팬들은 영국이나 스페인 같은 강팀을 닮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한 팀을 모델로 정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영국의 열정, 스페인의 패싱 능력, 독일의 멘털리티 등 각자 장점이 있죠. 한국 고유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K리그 스타일을 유지하되 (해외파를 통해)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야 합니다.”
-해외파 선수들이 주축인데 독창적 스타일이 가능할까요.
“대표팀이 발전하는 데는 두 가지 방향이 있어요. 강한 자국 리그를 갖거나 좋은 해외파 선수들을 보유하는 거죠. 후자의 경우 자국 리그는 약하지만 해외파가 합류하면 강력한 대표팀이 되는 아프리카 국가가 좋은 예죠.”
아시아 축구에 대한 그의 지식은 상당했다. 한·중·일의 장단점은 물론 K리그 각 팀의 특징도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영국 가디언, 미국 CNN과 AP통신 등 세계 유수 언론에 수년간 아시아 축구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얻은 결과물이다.
그는 지난해 정규리그에서 우승한 전북 현대에 대해 “정말 좋은 축구를 했다”고 평가했다. 이 팀 소속으로 최근 대표팀 적격 논란이 일고 있는 이동국 선수 얘기를 꺼냈다.
“전북 미드필더인 에닝요가 이동국에게 많은 어시스트를 했다는 점이 중요해요. 그런 관점에서 이동국은 대표팀에서 박주영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박주영이 없으면 (기회 포착이) 힘들 수 있어요.”
-현 대표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박주영이죠.”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박주영은 프랑스 AS모나코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만 압도적 스피드나 탁월한 개인기, 파워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듀어든은 그의 지능을 높이 평가했다.
“매우 똑똑한 선수입니다. 직접 골을 넣기도 하지만 볼을 배급할 줄도 알죠. 프랑스 리그가 유럽 톱5 리그에 속하는데 거기서 완벽하게 발전하고 있어요. 한국을 떠난 건 아주 잘한 결정입니다.”
-박지성은 어떤가요.
“박지성은 한국팀의 강력한 리더죠. 그의 합류 여부에 따라 다른 선수들의 집중력이 달라질 정도니까요.”
듀어든의 고향은 영국 블랙번이다. 볼턴과 지역적으로 매우 가깝다. 볼턴 원더러스에서 뛰고 있는 이청용에 대해 “볼턴에 사는 친구들이 이청용을 매우 아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청용은 생각보다 정말 잘하고 있어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만 설기현도 레딩 FC에서 뛸 때 초반에 잘하다 곧 하락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기성용에게 셀틱 가지 말라고 조언했었죠.
“셀틱은 좋은 클럽이지만 과거처럼 영국으로 진출하는 등용문이 되진 못해요. 리그 자체가 약해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한국 대표팀의 단점을 묻자 “수비”라고 대답했다. 그는 영국 아마추어 축구팀에서 중앙수비수로 뛰었던 경험이 있다.
“이정수(일본 가시마 앤틀러스), 황재원 김형일(이상 포항 스틸러스)은 좋은 수비 선수죠. 특히 이정수는 아주 좋은 선수(very good player)예요. 중국전에는 왼쪽 수비수로 나섰지만 중앙수비수가 더 잘 어울립니다. 조용형도 괜찮지만 경기장에선 그를 보조할 더 강한 수비수가 필요합니다.”
-좋은 선수들이 있는데 왜 수비가 안 될까요.
“괜찮은 수비수가 있으면 괜찮은 수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이유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직력을 갖출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해요. 미드필더도 문제가 있어요. 수비 가담을 잘 안하거든요.”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에 올라갈 가능성은 있나요.
“16강 갈 기회는 있어요. 그리스 나이지리아는 모두 약점이 있는 팀이죠. 다만 이번 동아시아대회처럼 경기하면 힘들고요. 다른 팀들도 한국을 상대로 승점을 쌓으려 한다는 걸 무시해선 안 돼요.”
-대표팀 소집훈련을 두고 프로구단과 마찰이 끊이질 않습니다. 대한축구협회의 행정은 어떤가요.
“K리그와 국가대표팀을 잘 조율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문제는 군대식 의사소통이에요. 의사소통이 가장 중요한데 위계질서를 고집한다면 해결하기 어려울 겁니다.”
영국 런던정경대학교(LSE) 졸업 후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하다 2001년 프리랜서 기자로 변신한 듀어든은 다음해 한일월드컵을 취재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과 맺은 인연은 이어갔다. 마침 서형욱 MBC 축구 해설위원의 추천으로 2005년부터 국내 한 포털사이트에 칼럼을 연재하게 되면서 아예 한국에서 살게 됐다. 같은 해 한국인 여자친구와 결혼, 지난달 첫 딸 ‘단비’도 낳았다. 최근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라는 책도 냈다.
서울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은퇴 후 강원도에서 살고 싶어 하는 그에게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물어봤다.
“큰 문제는 없지만…. 제발 기사 제목만 보고 화부터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목은 내가 다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하하. 그리고 박지성 평점 7점, 이청용 6점 등 해외 언론의 숫자놀음에 너무 민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