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육조거리, 광화문통, 세종로
입력 2010-02-18 17:49
1946년 9월 18일 미군정 법령 제106호로 ‘서울특별시 설치’가 공포돼 같은 달 28일부터 시행됐다. 이로써 서울은 일본의 한 지방 도시로 격하된 지 36년 만에 수도의 지위를 회복했다. 더불어 수도를 뜻하는 순 우리말 보통명사 ‘서울’도 고유명사가 됐다. 그 직후 서울시 산하에 ‘가로명 제정위원회’가 구성돼 서울의 동명과 가로명을 개정하는 일에 착수했다.
1880년대 초부터 서울에 집단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자기들 거주지에 일본식 이름을 붙였고, 이들 이름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 행정구역 명칭으로 공인됐다. 일본인이 가장 먼저 정착한 동네는 혼마치(本町), 일본공사관이 있던 자리는 다케조에마치(竹添町), 일본 육군대장이 서울로 입성한 길은 하세가와마치(長谷川町)로 부르는 식이었다. 이렇게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은 한국식 동(洞)으로, 남쪽은 일본식 마치(町)로 부르는 상태가 25년 정도 지속되다가 1936년 이후 모든 행정구역 명칭이 일본식 마치로 통일됐다.
가로명 제정위원회는 마치를 다시 동으로 바꾸고, 왜색이 짙은 지명은 옛 이름을 회복시키거나 우리 위인의 이름과 시호를 붙였다. 일본인 동네의 중심이던 혼마치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의 시호를 따 충무로가 됐고,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고카네초오(黃金町)는 살수대첩의 명장 을지문덕을 기리는 을지로가 됐다. 이순신으로 일본 식민지배의 그림자를, 을지문덕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의 자취를 지우겠다는 뜻이었다. 다케조에마치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최초로 순절한 민영환의 시호를 따 충정로가 됐다.
이때 한 가지 특이한 결정이 있었으니, 바로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바꾼 일이다. 그 남쪽 태평통은 중국 사신들의 숙소인 태평관에서 딴 것으로, 일본인이 한국인의 ‘사대주의’를 조롱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그 태평통은 그대로 두면서 광화문통을 굳이 세종로로 바꾼 것은 이 길이 조선왕조 개창 이래 수백년간 나라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광화문통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이 길의 원 이름은 육조거리였고, 개화기 외국인들은 영어로 ‘Cabinet Street’라고 썼다. 내각의 길이라는 뜻이다. 경복궁 앞길 좌우로 육조 건물이 늘어서 있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해방 후 가로명 제정위원회가 이 길에 세종의 묘호(임금의 시호)를 붙인 것은 일제 강점 이전의 역사적 상징성을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임진왜란 이후 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폐허 상태로 있었지만,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이었다. 그래서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은 서울에서, 나아가 나라 전체에서 가장 넓은 길로 조성됐다. 이 길은 서울 조영(造營)의 지침서였던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가 정한 ‘제후칠궤(諸侯七軌·제후의 길은 마차 7대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너비로 한다는 뜻)’보다 훨씬 넓었다. 이 길의 일차적 용도는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왕조 권력은 이 길 위에서 벌어지는 장엄하고 화려한 왕의 행차를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위압하고 감복시키려 했다.
그런데 어떤 권력이든 ‘과시와 홍보’만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는 없다. 자동차가 대부분 도로면을 점거하기 전에는 일방통행로란 없었다. 길은 ‘양방향의 통행’, 즉 소통의 공간이다. 왕과 신하, 만백성으로 이어지는 중세적 위계질서를 전제로 해서 보자면, 궁궐 안의 전각은 왕의 공간이었고 궁궐 마당은 신하들의 공간이었으며 궁궐 문 밖 넓은 길은 백성들의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육조거리는 권력의 주체와 대상이 직접 만나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이 길의 끝자락, 지금 광화문 광장 기념비전 옆에 있던 다리에 ‘은혜로운 정치의 다리’라는 뜻의 혜정교(惠政橋)란 이름을 붙인 것도, 그리고 이 다리 앞에서 왕이 가마를 멈추고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듣는 관행을 만든 것도, ‘소통’을 통해 ‘민심’을 얻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광화문 광장이 ‘시정 홍보용’으로만 사용된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길은 본래 권력이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이었으니 너무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진정한 권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권력의 주체와 대상이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한다. 일제 강점기의 ‘광화문통’을 연상시키는 광화문 광장이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 공간의 정치적·상징적·문화적 의미를 되새긴다면, ‘세종 광장’으로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