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오승 (4) 신앙-율곡전서 두 바퀴가 법학자의 길로 인도

입력 2010-02-18 21:24


1년간 재수를 한 후 1969년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기대했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교양 교과과정이 자리를 못 잡아 너무 개론적이거나 지나치게 전문적이었다. 그래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캠퍼스에선 데모가 연일 이어졌다. 1학년 때 부정선거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전태일 사건, 교련반대, 위수령 발동, 10월 유신 등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나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다.

3학년 때는 위수령 발동으로 대학이 문을 닫았다. 학생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친구들은 대학에서 제적돼 군대로 끌려갔다. 4학년 때에는 이른바 ‘10월 유신’으로 헌법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법 공부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학업을 그만두려 했다.

법학에 대한 관심 회복은 당시 혼란을 피해 충남 부여군 은산면에 위치한 곡부서당에 있을 때 이뤄졌다. 판사나 변호사, 고위 공무원이 아니라 학자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이때였다. 농촌 봉사활동을 통해 알게 된 그곳에서 율곡 선생의 후예인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선생님을 만났다. 이분의 지도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 사서(四書)를 비롯해 성학집요(聖學輯要)의 한문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율곡전서를 보다가 우연히 ‘만언봉사’(萬言封事·밀봉한 장문의 상소)를 접했다. 그때까지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많은 글을 읽었으나 늘 아쉬움이 남았다. 적절한 대안이 없거나 대안을 제시해도 단편적, 혹은 편향적이었다. 그런데 이 상소문은 당시 우리나라가 안고 있던 제반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하고 종합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글을 읽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장차 지향해야 할 삶이 판사나 변호사 같은 법률가가 아니고, 고위 공무원도 아니요, 농촌운동가도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학부 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농업문제와 소유권을 깊이 연구했다. 곧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했으며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법학 교관으로 복무했다. 1979년 3월 동아대 정법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1980년 경희대, 1992년 서울대 법대 교수가 됐다.

법 공부를 그만두려 한 적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신앙 때문이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던 나는 서울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여길 만한 법학자가 되고자 했으나 이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꿈꿨다.

이전에는 법학 책을 하루 종일 읽어도 지루한 줄 몰랐는데, 이후에는 성경책이나 신앙서적만 읽게 됐다. 법학서적은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전공에 대한 흥미를 잃고, 급기야 법학을 의미 없는 학문으로 여기게 됐다. 아예 교수를 그만두고 신학대학원에 갈까 고민했다. 이 문제를 놓고 나는 오랫동안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러다가 성경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부터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법학 전공을 결정할 때 나는 신앙이 깊지 않았다. 기도하지 않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선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법학자의 길로 인도하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관계자를 만나게 하셨고, 또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셨다. 이것을 깨닫고 전공의 의미와 가치를 신앙 안에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나의 경제법 연구 목적은 ‘바람직한 경제 질서의 추구’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경제 질서의 형성’으로 바뀌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