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3) LG그룹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 “길 없는 밀림 헤쳐나가자” 전자산업 개척
입력 2010-02-17 18:11
“엽전이 양코쟁이와 쪽바리 상대로 기술 경쟁해서 본전이나 찾겠나. 이럴 바엔 돈을 은행에 맡겨놓고 이자나 챙기는 게 더 이익 아니냐.”
1959년 금성사(현 LG전자)가 ‘골드스타’란 상표를 붙여 처음으로 국산 라디오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쏟아진 반응들이다. 당시는 미군 PX(Post Exchange·군 기지 내 매점) 유출 상품과 밀수품 라디오가 전국에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당시 사장은 사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매화는 모진 추위를 겪어야 비로소 향기를 뿜는다는 교훈처럼 고생 안 하고 얻어지는 보물이 어데 있능교. 금성사가 지금 불황에 빠져 있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망할 지경은 아니니 걱정들 마소. 지금 우리는 전자공업이라는 길 없는 밀림 속을 헤쳐 나가는 개척자인기라. 가까운 시일 언젠가는 고생한 만큼 보람도 얻게 될 테니 그때까지 모두들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일해주소.”
1961년 가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 금성사 부산 연지동 공장을 찾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 뒤 강력한 밀수금지 조치와 함께 밀수품 일제 단속령을 내렸다. 또 그들이 하는 일을 알리기 위해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도 전개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문을 닫느냐를 고민했던 국내 유일의 연지동 공장은 밀려드는 주문량에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구 회장이 주변의 회의적 반응에 전자산업을 접었더라면 오늘날 LG전자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럭키크림에서 시작해 ‘깨지지 않는 크림통’을 찾다보니 플라스틱 산업에 진출했고, 불모지인 전자공업 분야와 정유산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간 구 회장의 63년 인생은 ‘국내 최초’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구 회장이 25세이던 1931년 7월 진주의 포목점 ‘구인회상회’에서 시작한 LG그룹은 현재 주력인 LG전자를 비롯해 53개 계열사 18만6000명(해외 8만9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매출 125조원의 글로벌 회사로 성장했다.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 미국과 일본에서 훌라후프가 레저용 운동기구로 크게 히트치는 것을 보고 온 넷째 동생 구평회(당시 직책 지배인) 제안으로 국내 최초로 만들어낸 훌라후프는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팔려나가 전 국민들 사이에 ‘훌라후프 붐’을 일으켰다. 도시와 농촌 전국 어디를 가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훌라후프를 돌리다보니 당시 문교부 장관은 유행을 잠재우기 위해 훌라후프가 건강에 해롭다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
락희(樂喜)화학은 럭키치약부터 칫솔, 빗, 세숫대야, 식기 등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필수품들을 쏟아냈다. 둘째 동생 구정회 사장 집의 미제 냉장고가 고장 난 것은 1965년 4월 국산 냉장고 1호를 만든 계기가 됐고, 1966년 8월 1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흑백 텔레비전이 탄생했다. 1967년 9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사와 기술제휴로 국내 최초로 생산된 에어컨은 고층 빌딩 증가에 따른 에어컨 필요성을 예견하고 이를 제안한 구자경 락희화학 전무의 공이 컸다.
1966년 구 회장은 민간기업으론 처음으로 외자를 도입해 호남정유를 설립, 정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라. 뒤따라가지 말고 앞서가라. 새로운 것은 만들라”는 그의 기업철학은 외산을 밀어내고 금성사가 국내 최초 제품들을 잇달아 내놓은 원동력이었다.
이 같은 경영철학은 1951년 7월엔 지수보통학교 시절 같은 반 죽마고우이자 나중에 사돈을 맺게 된 삼성물산 이병철 사장이 공동출자로 외국에서 원당 수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게 했다.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에서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구 회장은 대범하면서도 소탈한 성품을 지녔다. 1950년대 락희화학 시절엔 겨울철 미군 장교들이 입는 군복 상의인 파카코트를 소매가 닳도록 입어 ‘파카코트 사장님’이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담배도 비싼 것과 싼 것 두 가지를 갖고 다니면서 좋은 것은 거래처 손님에게 권하고, 싸구려 담배는 자신이 피웠다. 그는 나이가 한참 어린 신입사원을 부를 때도 김형 또는 박형 하고 꼭 형(兄)자를 붙이는 자상하고 사려 깊은 리더였다.
구 회장의 ‘개척정신’ ‘인화단결’ ‘연구개발’ 창업이념은 구자경 명예회장과 구본무 회장으로 이어지면서 숙부와 조카가 경영권 다툼을 하지 않고 협력하는 LG 문화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이명희 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