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오승 (3) 공부 좀 한다고 기고만장하다 대입 낙방 좌절
입력 2010-02-17 17:43
어릴 때는 기고만장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엔 공부만 잘하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 또 자신도 자기가 최고인 줄 안다. 이후 많은 시련과 역경을 통해 내가 다듬어졌다. 하지만 당시의 그 기고만장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1963년 중학교 2학년 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됐다. 지각을 걱정한 나는 일찍 일어나 있었다. 내 방 불이 켜진 것을 본 옆집 친구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아침 먹고 내 아들하고 같이 가려무나.” 친구가 여전히 자고 있자 그 어머니는 “오승이는 벌써 일어나 공부하고 있던데, 너는 몇 번을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니 그래서 좋은 학교 가겠니”라고 크게 꾸짖었다. 하지만 이 친구 아버지는 웃으시며 “그러면 뭘 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오승이나 늦잠 자는 우리 애나 모두 같은 고등학교에 갈 텐데”라고 했다. 무심코 하신 말씀이었으나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는 것, 그것이 현실이었다. 또 집안 형편상 타지로 가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같은 고등학교에 간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이 일은 내게 약이 됐다. 나는 서울의 용산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문제는 학비였다. 합격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한마디로 “일희일비(一喜一悲)”라고 하셨다. 한편으로 기뻐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슬퍼하셨다는 것이다.
입학을 했지만 내 삶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후암동 해방촌에서 자취하며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2학년 때부터는 입주과외에 나섰다. 용산중학교 1학년 학생의 집에서도 지냈고 심지어 같은 반 학생 집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당시 반에서 58등 꼴찌였던 그 학생이 겨우 두 달 만에 30등으로 껑충 뛰었다. 난 전교 1, 2등을 다퉜고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고3이 되자 성적이 떨어졌다. 다들 공부하는 시간에 다른 학생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과외 학생과 같은 방을 써 집중이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밤 11시쯤 인근 사립독서실에 가서 밤새워 공부하고 아침에 돌아와 학교로 향했다.
며칠 후 학생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밤에 어린애를 혼자 집에 놔두면 어떡해”라며 심하게 꾸짖었다. 과외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독서실에 놀러간 것도 아닌 것을 아시면서 자기 자식만 귀하다고 하는 그 어머니가 너무 야속했다. 나는 다음날 그 집을 나와 하숙집으로 옮겼다. 성적은 두 달 만에 회복됐다. 두 달치 하숙비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길은 또 열렸다.
이전 입주과외 학생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오라고 했다. “우리 애가 학생 아니면 공부를 않겠대. 가정교사는 따로 둘 테니 생활지도만 부탁해.” 못 이기는 척 나는 다시 그 집으로 향했다.
그 고생을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진학에는 실패했다.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다 낙방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침 일찍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법대 캠퍼스 게시판에 내 이름이 보이지 않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밤 새워 고민하다 다음날 안동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지난밤에 내가 좌절한 나머지 혹시 딴 생각을 먹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셨다고 했다. ‘기고만장’ 권오승이 겪은 첫 패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싶다. 이후 나는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