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銀의 굴복?… 인플레 선제 대응 사실상 포기

입력 2010-02-16 21:20


기준금리를 12개월째 동결한 2월 금융통화위원회 결정을 계기로 한국은행이 ‘점진적 금리 인상’을 사실상 포기하고 정부의 전방위 압박에 굴복했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자산가격 상승에 대한 선제 대응 대신 ‘더블 딥(경기가 반짝 상승한 뒤 재하강하는 것)’ 우려를, 중앙은행의 독립성 대신 정부와의 정책 공조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특히 해외 언론과 금융기관들은 한은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시각이 강하다.

◇“한은은 정부 협력자”=SC제일은행의 오석태 상무는 16일 “2월 금통위 결정과 이성태 한은 총재의 발언 등을 볼 때 한은은 그동안 견지해 왔던 ‘인플레 선제적 대응’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며 “한은은 대외 경제여건 등을 이유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가 기준금리 인상에 나선 이후에나 금리를 올릴 방침임을 천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계 증권사의 한 이코노미스트도 “외국계 금융회사에서는 소비와 투자가 ‘V’자로 회복되고 고용 상황도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양호한 한국이 초저금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고 전했다.

이를 방증하듯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은에 ‘정부 협력자(government's helper)’라는 명예롭지 못한 호칭을 붙였다. WSJ는 13일자 ‘한국은행: 정부의 협력자’ 제하의 기사에서 “전 세계에서 한국만큼 금리 인상 전망이 후퇴한 국가는 없다”며 “애초 한국은 가장 먼저 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였지만 계속 동결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WSJ는 “금리 인상이 경제에 파급을 미치려면 수개월이 걸리기에 지금 인상에 나서는 것이 현명(prudent)하다”고 덧붙였다.

2월 금통위 개최 하루 전인 11일엔 HSBC의 프레드릭 뉴먼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한국의 견실한 경제 사정을 감안할 때 한은이 현재보다 기준금리를 1% 포인트 인상해도 인플레를 잡기에 충분하지 않다”며 “금리 인상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10일에는 모건스탠리의 샤론 램 이코노미스트가 “금리 인상 시기를 늦출수록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수준을 지속하는 만큼 한국경제에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며 조속한 금리 인상을 권고한 바 있다.

◇시험대에 선 한은=이처럼 2월 금통위 결정이 한은의 통화정책 기조 변화 가능성으로까지 파급된 것은 이성태 총재가 이날 기준금리 인상 필요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실과 연관이 깊다. 이 총재는 지난해 12월 금통위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문(금리 인상을 포함한 출구전략)으로 조금씩 움직여야 한다”고 발언하는 등 선제적인 금리 인상 필요성을 끊임없이 언급해왔다.

익명을 요구한 은행계 채권 애널리스트는 “대통령까지 나서 하반기 이후 금리 인상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임기 만료가 가까운 이 총재 등 한은 집행부가 선제 대응을 고집할 수 없었던 것 아니겠느냐”며 “금리 인상이 가져올 부작용도 있는 만큼 한은은 ‘모험’ 대신 순응주의를 택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독립적인 정책 판단 대신 정부와의 공조를 택한 한은의 결정이 조만간 한은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샤론 램 이코노미스트는 “하반기나 내년 초 인플레가 가시화할 경우 한은은 금리 정상화(경기확장도, 긴축도 아닌 중립적인 상황에 맞는 금리 수준으로 복귀하는 것)와 통화긴축을 함께 시행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며 “이 같은 급격한 금리 조정은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WSJ도 올 하반기 이후에는 한은이 급격한 금리 인상에 나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배병우 기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