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놀란 이변, 주종목 1000m 내친김에 하나 더…
입력 2010-02-16 21:35
두둑한 배짱에 괴력의 스퍼트 강점… 얼음판 가장 빠른 사나이 등극
모태범(21·한국체대)의 깜짝 금메달 원동력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모태범은 이규혁(32), 이강석(25)처럼 본인이 반드시 500m 메달을 따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경기에 임했다. 레이스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모태범은 1000m가 주종목이다. 한국 선수단도 밴쿠버로 떠나기 전 모태범을 잘하면 1000m 은메달 정도로 생각했다. 500m 메달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메달에 대한 압박감 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었던 모태범은 1차 레이스에서 전체 선수 가운데 2위를 차지하며 ‘대형 사고’를 예고했다.
모태범은 “1차 레이스 기록을 보고 나도 긴가민가했다”고 말했다. 경기장에서 만난 한 외신 기자는 변변한 500m 세계랭킹조차 없는 모태범이 1차 레이스 2위에 오르자 “저 선수는 누구냐?”고 물었다.
모태범은 2009∼2010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 500m 세계랭킹이 14위에 불과하다. 김관규 대표팀 감독에 따르면 그것도 월드컵 1∼3차 대회는 별로였고, 4차 대회부터 500m 기록이 나아졌다고 한다.
1차 레이스에서 2위를 한 뒤에는 모태범의 배짱이 빛을 발했다. 모태범은 “1차 레이스가 끝난 뒤 자신감이 생겼다. 2차 레이스도 그냥 내 실력껏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규혁, 이강석이 1차 레이스에서 각각 4위, 10위를 한 뒤 2차 레이스에서 더 나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과 대비된다.
경기 도중 얼음판 빙질을 관리하는 정빙기가 고장나 경기가 지연된 것도 결과적으로 모태범에게 도움이 됐다.
이날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에서는 1차 레이스 1∼10조 경기가 끝난 뒤 정빙기가 두 차례 고장나는 바람에 레이스 일정이 1시간30분가량 연기됐다. 모태범은 1차 레이스에서 경기 중단 사고 이후인 13조로 뛰었다. 대개 기록이 좋은 금, 은, 동메달 후보들은 대부분 뒷조로 배치되는데 경기가 중단되면서 세계적인 선수들이 경기 리듬 조절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스케이팅 기술보다 순간적인 힘과 강한 체력으로 승부하는 모태범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김 감독은 “정빙기가 고장나 몇 번이나 얼음에 물을 뿌려대면서 얼음의 활도(미끄러지는 정도)가 나빠졌다. 그게 힘이 좋은 모태범에게는 어드밴티지가 됐다”고 밝혔다. 김 감독은 “스케이팅 기술이 좋은 이규혁이 메달권에 들지 못한 것은 정빙기 사고 탓이 컸다”고 했다.
7살 때부터 부모의 권유로 취미 삼아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모태범은 주니어 시절부터 꾸준히 국제 경험을 쌓았다. 모태범은 중학교 때 골반을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오랜 통원 치료로 회복하면서 다시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모태범은 잠실고 재학 시절 2006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500m 1위, 1500m 2위, 3000m 3위에 오르며 한국 빙속을 이어나갈 기대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에는 이규혁, 이강석이라는 큰 산이 있어 모태범은 1000m와 1500m에 주력했다.
김 감독은 “태범이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지는 걸 누구보다 싫어한다. 겉으로는 얌전한 것 같지만 승부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모태범은 금메달을 확정지은 뒤 태극기를 등에 걸치고 관중들에게 인사했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가진 외국 기자들과의 스탠딩 인터뷰에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러웠는지 연방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밴쿠버=이용훈 기자 co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