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오승 (2) 여섯살 때부터 교회 출석… 믿음 약해 뒤늦게 세례

입력 2010-02-16 17:43


나는 부모로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내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 가정에서 중요한 것은 아들의 공부보다 집안일이었다. 논밭에서 김을 매거나 소에게 꼴을 먹이는 일,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 오는 일이 내 몫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항상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일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나는 늘 부족한 시간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가 야속했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졸업식 때 학교에서 상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도 이를 기뻐하셨다. 나는 불만에 찬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지난 6년 동안 학교에 한번이라도 오신 적 있으세요?” 아버지는 “없다”고 하셨다. 또 “지난 6년 동안 공부하라는 말을 단 한번이라도 해 보신 적 있으세요?” 아버지는 미안한 표정으로 “없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공부는 잘하니까 하라고 할 필요가 없었고, 일은 안 하니까 하라고 할 수밖에 없지”라고 하셨다.

안동 권씨 유교 집안의 35대손이었지만 나는 여섯살 때부터 집 앞에 있는 이천교회에 다녔다. 일하는 것만 빼면 어린 시절 농촌에서 보낸 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다. 많은 기억이 그곳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있었던 일들이 새롭다. 하루는 성경공부를 하다 하나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궁금했다. 이를 전도사님에게 물었다.

여섯살 꼬마에게 의외의 질문을 받은 전도사님은 잠시 당황하더니 “잘 모르겠다. 다음에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1주일 후 전도사님은 “굳이 따지자면 남성 쪽에 더 가깝다”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지”라고 쉽게 이야기했다. 물론 “하나님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초월적인 존재”라고 앞서 설명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집사님이 어린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에 모여 있는 어린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들 중에서 장차 목사도 나오고, 장관도 나오게 해 주세요.”

이 기도를 들으며 ‘저렇게 기도해도 되나. 너무 우리 욕심만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저런 기도도 과연 들어주실까’라고 의문을 가졌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몇 명 안 되는 아이들 가운데 실제 목회자가 나왔고 장관도 나왔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신앙생활은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매우 순조롭게 지속되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학습을 받았지만 곧 바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세례 예식에서 1년 선배들이 하나님께 하는 선서를 보며 나는 선서할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선서를 정직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미룬 세례는 1980년 부산 오산교회에서 받았다. 그때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적인 세례만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받을 것이라면 진작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상태는 40세가 넘어 구역장으로 활동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베푸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