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승렬] 일본의 망언과 오리엔탈리즘
입력 2010-02-15 18:54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이 지난 2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한일강제병합과 관련해, 피해국의 고통을 기억해야 하지만 “그 당시 세계의 상황을 본다면 그런 행위가 일본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었는지 모른다”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라는 불가피한 역사적 흐름의 일부였다는 인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일본의 망언이야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지라 이번 발언이 특별할 것까지 없지만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인 입장을 표명한 민주당 정부에서 과거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발언이 나와 적잖이 실망했다. 일본의 이러한 태도는 단지 국제 사회의 도의 차원을 넘어 세계사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冷戰이 과거사 반성 덜게 해
과거사 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은 흔히 독일과 비교된다. 유대인 학살을 포함한 만행에 대해 서독이 반성하고 보상한 것은 독일인들이 일본인보다 더 도덕적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차이는 오히려 당시 유럽과 동아시아가 직면한 냉전 상황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서유럽의 강화를 위해서 프랑스와 영국과 같은 강대국들과 서독의 화해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미국이 적극적인 서독 과거정책을 추진했다. 이와 달리 중국 공산화 이후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일본 중심의 냉전 전략을 구사한 결과 일본은 이웃 국가들과의 화해 노력을 할 필요가 적어졌다.
미국 내 로비의 차이도 사뭇 달랐다. 유대인들과 같이 독일의 과거 반성을 촉구했던 세력이 강력했지만, 일본의 적극적인 과거 정책을 촉구할 수 있는 세력은 적었다. 더군다나 전쟁과 관련된 독일의 상징이 아우슈비츠라면 일본의 상징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다. 세계 여론에서 일본은 생체실험이나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침략자라기보다 원폭의 피해자로 각인되어 있다. 일본은 이러한 전후 동아시아의 냉전 상황 덕분에 과거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반성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소재는 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탈(脫)아시아주의를 외치며 서양 따라잡기를 시도했던 일본은 오래 전부터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역사관을 본받은 일본의 동아시아사 서술은 서양의 동아시아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독일 유학 시절,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 것으로만 해석한 보수주의 역사가의 글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런 내용들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사관이며,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 맞닿아 있다.
영토를 침탈하는 제국주의는 대부분 사라지고, 학계에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지만,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역사적 성찰과 반성은 유럽에서 아직도 드문 현상인 것 같다. 예컨대, 영국 사회는 아편 복용과 판매를 심각한 범죄로 처벌했지만,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에 대해 비판적 서술을 하는 역사교과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대인 학살은 비판의 대상이지만 제국주의 침략은 아직도 그렇지 못하다. 일본 외상의 발언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반성하지 않는 유럽에서 비판받기보다 공감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정계가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제국주의적 역사인식 공유
올해는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동아시아 역사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 왔지만, 너무 일본 제국주의적 침략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 이제 일제를 서양 제국주의의 한 고리로 보고 이로 말미암은 역사 갈등도 세계적인 차원에서 해소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독일 역사교과서 동아시아사의 오리엔탈리즘을 수정하기 위해 독일의 게오르크 에케르트 국제교과서연구소와 협력하여 보조교재를 출간하기로 했는데, 이는 매우 고무적이다. 이런 구체적인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김승렬(경상대 교수·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