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미디어 캔버스
입력 2010-02-15 20:04
한때 서울역 앞 옛 대우빌딩의 상징성은 대단했다. 수도 서울의 관문을 통과한 뒤 처음으로 대면하는 건물이자 1970년대 경제성장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검붉은 구조물은 폭 100m, 높이 60m에 달하는 압도적 규모에다 수직으로 선이 내려 꽂히는 파사드(건물 전면)로 인해 초행길 시골 사람들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건물 너머의 남산을 보지 못하고 대우빌딩이 주는 완강한 권위주의에 먹먹했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사연 많은 이 빌딩의 변신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먼저 대우그룹 해체 이후 금호아시아나를 거쳐 지금은 외국계 펀드회사가 운영하는 서울스퀘어로 간판이 바뀐 이후 예전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 데다 미술작품을 품는 캔버스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외양은 리모델링 과정에서 황토색 타일로 단장하니 한결 산뜻해졌다. 애초의 공모전 당선작은 푸른 유리 건물이었으나 곡절 끝에 지금처럼 장소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미디어 캔버스는 빌딩을 작품의 벽면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낮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어둠이 도시를 덮으면 23층 높이의 초대형 빌딩에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미술품이 밤의 정령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건물이 숨겨진 4만 여개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환상적인 화면을 연출하는데, 현재는 매일 저녁 6시부터 11시까지 매시 정각부터 10분간 가동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영상물로 곧 기네스북에 오를 것이라고 한다.
미디어 캔버스를 꾸미는 작품 중 첫 번째는 영국 작가 줄리안 오피의 ‘Walking people’이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여성, 배가 나온 중년, 팔자걸음을 걷는 사람 등 그래픽으로 처리된 7명의 남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끊없이 걸어가는 작품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도시적 삶을 압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중절모에 우산을 쓴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속 주인공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양만기의 ‘Mimesis scape’와 번갈아 상영되고 있다.
설을 전후해 서울역을 오간 사람들은 이 21세기형 랜드마크에 강렬한 전율을 느꼈을 법하다. 서울스퀘어의 경험은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눅 들던 대우빌딩과 다르다. 신세대의 감성코드에 맞추었다는 점에서는 도시의 풍경을 한결 젊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미디어 아트는 작가의 메시지를 무차별적이고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시민들의 감응을 자주 점검하고 반영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겠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