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2) 현대 세운 정주영·현대차 키운 정몽구] 승부근성·추진력…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입력 2010-02-15 20:42


‘안 되는 것은 없다.’ 범 현대그룹 창업자 아산(峨山)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신념이다. 1967년 정 명예회장은 미국 포드사와 결별을 선언하고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우리 기술로 만든 우리 브랜드의 자동차가 필요하다는 게 정 명예회장의 생각이었다. 모험이었다. 주변에서도 우려했다. 포드와 합작회사 형태로 만들던 조립자동차 생산마저 중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우리 고유 브랜드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한국 기계공업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라며 밀어붙였다.

◇불가능은 없다=정 명예회장의 기술자립 의지는 포니 정(정주영 회장의 넷째 동생인 정세영 고 현대자동차 회장의 애칭)을 통해 76년 1월 최초 국산 모델 ‘포니’로 나타났다. 고유모델 개발에 힘쓴 현대차는 결국 86년 ‘포니엑셀’로 자동차 강국 미국에 진출, 언론들로부터 “국민 모두가 기뻐해야 할 경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포니엑셀은 미국 진출 4개월 만에 5만2400대가 팔려 58년 프랑스 르노사가 세운 미국 수입차 1년 최다 판매기록을 경신하는 등 86년에만 20만3000대를 수출했다.

‘기계공업의 꽃’인 자동차가 미래 산업을 주도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정 명예회장의 뜻을 포니 정이 구체화시킨 것이다. 이후 98년 취임한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은 품질경영에 주력, 현대·기아차를 세계 자동차 시장 5위권 기업으로 끌어올렸다. 2007년 그룹 매출 100조원을 돌파하며 재계 2위를 지키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총 464만여대를 팔아 글로벌 점유율 7.8%를 차지했다.

◇끊임없는 개척정신=정 명예회장은 항상 ‘해야 한다’는 소명과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주변의 ‘터무니없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승부수를 던졌던 것이다. 그는 71년 조선소 설립을 위해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00원 지폐와 울산 미포만 지도 한 장을 들고 영국에서 돈을 빌리고 그리스에서 선박을 수주했다. 짓지도 않은 조선소가 선박 건조를 따낸 것이다. ‘산업보국(産業報國·산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의 리더십은 오늘날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등을 세계적 회사로 만든 원동력이 됐다.

정 명예회장은 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경해 막노동을 전전하며 자수성가의 꿈을 이뤘다. 50년 1월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창업한 그는 한국전쟁 복구사업을 통해 경제계 전면에 등장했다.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시장을 찾아 나섰고 자동차, 중공업, 전자 등 기간산업 분야에 과감히 진출, 한국을 신흥공업국 대열에 올려놓은 주역이 됐다. 또 77년 기업인들의 만장일치 결의를 통해 전국경제인연합회장에 취임한 이후 5차례나 회장직을 지내며 재계 수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검소한 생활과 함께 스스로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고 표현하며 직원들과 씨름, 배구 등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99년 10월 미국 헤리티지재단은 외국인 최초로 ‘정주영 펠로십(연구기금)’ 프로그램을 창설했다. 헤리티지재단은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기억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을 원했는데 정 회장이 바로 그런 인물이며 한국의 성공담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온 20세기가 낳은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의 피 그대로 물려받은 정몽구=정 회장은 아버지(정 명예회장)를 쏙 빼닮았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정 회장은 과감한 결단력과 승부 근성, 무모하리만큼 강한 추진력을 가졌다. 말보다 행동이 앞선 것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2008년 4월 현대차는 중국 베이징에 제2공장을 완공했다. 부정적인 시각도 많았다. 그해 말 미국 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자동차 시장 위기가 가시화됐기 때문. 하지만 중국은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미국을 제치고 최대 자동차 시장이 됐다. 현대·기아차가 이미 충분한 생산능력을 확보한 뒤였다. 결국 지난해 북경현대와 동풍열달기아는 57만309대, 24만1386대씩 팔아 각각 93.6%, 70.0%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2008년엔 ‘제품 품질 3년 내 세계 3위, 품질 브랜드 5년 내 세계 5위’를 뜻하는 ‘GQ(Global Quality)-3355’를 선포했고, 지난해 글로벌 메이커 재도약을 위한 ‘퀄리티(품질) 마케팅’ 추진을 선언했다. 품질경영은 곧 품질향상으로 이어졌다. 현대차는 2009년 제이디파워 신차초기품질(IQS) 지수에서 일반 브랜드 부문 1위에 올랐다. 품질에 자신 있다는 혼다, 도요타를 제치고 최정상에 선 것.

글로벌 현장경영에도 적극 나서 미국, 중국, 인도, 터키, 슬로바키아, 체코, 러시아 등에 생산·연구거점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현대차는 2004년 세계 최단기간 수출누계 1000만대를 돌파했다. 90년대만 해도 열악한 브랜드 인지도와 품질문제로 고전하던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정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글로벌 선두업체 도약’을 선언했다. 능동적이고 창의적 대응을 통해 얼마든지 선두로 나갈 수 있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와 관련, 미국 포춘지는 올해 신년호에서 현대차의 성공에 대해 “품질·기술 중심 경영전략과 공격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 등이 강점이 됐다”며 정 회장의 리더십을 평가했다.

최정욱 기자 jw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