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사역 한 길 김해성 목사의 실패와 도전

입력 2010-02-12 15:25


[미션라이프] 이르면 오는 상반기 경기도 광주에 국내 최초의 국제다문화학교가 문을 연다.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자녀 120명이 우선 입학하게 된다. 다문화학교 설립을 추진중인 ㈔지구촌사랑나눔 대표 김해성(49) 목사는 “국내 이주 노동자 자녀 1만 명 중 2000명만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며 “이들의 장점인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을 극대화시킨다면 국격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목사는 앞으로 중고등학교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국내 체류 외국인이 120만명에 육박하면서 이들의 자녀교육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문제를 고민하던 김 목사는 결국 학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현재 서울 가리봉동에 자리한 지구촌사랑나눔 두 동의 건물엔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이주민을 위한 의료센터, 쉼터, 복지센터, 상담소, 방과후학교, 어린이집, 중국동포교회 등이 입주해 있다. 20년 가까이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해오면서 김 목사가 그때그때 필요에 부딪히면서 만들게 된 것들이다.

국내에서 죽어나간 외국인 노동자들 장례를 치르다가 ‘뒤치다꺼리보다는 이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병원 설립을 생각해냈다. 오갈 곳 없는 이들을 받아주다 보니 자연스레 쉼터도 만들게 됐다. 쉼터에 이주 노동자 가족이 들어와 살다보니 어린이집도 필요했다. 김 목사의 다양한 사역은 이런 식으로 확산됐던 것이다.

현재 전문의 5명이 근무하는 병원과 상담소 등 전체 직원은 80여명. 한 달 자원봉사자만도 연인원 1만명이 넘는다. 병원과 쉼터 등 모든 사용료는 일절 무료다. 전체 시설 비용만 한 달에 수억원에 이른다. 수익 사업 없이 모두 후원으로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김 목사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예배다. 한신대 졸업 후 국내 노동자 사역을 했던 그는 90년대 초반 공사판에서 다친 이주 노동자의 보상을 도와주면서 국내 노동자에서 이주 노동자로 사역의 방향을 틀었다. 이들의 인권을 위해 제도 개선은 물론 보상과 밀린 월급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하지만 정작 보상을 받은 이주 노동자는 고국에 돌아간 뒤 악덕 기업주가 되거나 마약 중독자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게 됐다. 그동안의 사역은 철저한 실패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95년부터 성남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몰려오는 이주 노동자들을 찾아가자는 마음으로 2000년엔 아예 가리봉동에 둥지를 틀었다. 병원 건물 6층에 자리잡은 중국동포교회 주일예배엔 매주일 700여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예배에 참석한 이주 노동자들이 헌신하면서 이들을 사역자로 키우기 위한 신학교도 필요했다. 불법 이주민을 국내 신학교에 입학시키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2001년 설립한 세계선교신학대엔 지금까지 500여명이 거쳐 갔고, 지금도 80여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공부하고 있다.

병원이나 식당에서 만난 이주 노동자들은 “목사님이 계시니까 우리가 한국에서 밥도 먹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며 김 목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김 목사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성남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는 그에게 롤모델 같은 존재다. 김 목사가 한신대 3학년 때 발생한 5·18 광주민주화항쟁은 김 목사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신앙의 회의를 갖게 했다. 더군다나 그 모든 비극의 배후로 지목되던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지지해주는 모습에 신학은 물론 신앙마저 김 목사에겐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됐다. 하지만 성남주민교회에서 만난 이 목사가 민족의 통일과 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사역하는 모습에 도전을 받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김 목사가 성남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그때의 인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은 2005년 소천한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다. 국내 불법 체류자 자진 신고 기간에 김 목사의 초청으로 가리봉동을 찾은 이 목사는 이주 노동자들의 실태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암투병중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전했다. 지금 병원 건물로 사용하는 7층 짜리 건물 역시 이 목사가 기증한 것이다. 김 목사는 이 건물 이름을 ‘이중표 목사 기념관’으로 했고, 그 안에 무료병원, 급식소, 쉼터, 신학대학, 교회를 지어 이 목사의 유훈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 목사는 지금까지 이주 노동자 사역을 하는 동안 고난도 많았지만 영광도 많았다고 말한다. 불법 이주 노동자를 잡겠다고 쳐들어 온 법무부 공무원들을 막아섰다가 공무집행방해로 1번 구속됐고, 13번 입원해야 했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 인권을 위해 한 길을 달려온 그에게 정부와 인권 단체들은 표창으로 격려했다.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정치권의 러브콜도 많았다. 그때마다 김 목사는 “내 본분은 목회”라며 단박에 거절했다.

그는 국내 체류 120만명의 외국인은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주신 기회라고 말한다. 특히 농촌교회나 도심의 상가교회에겐 블루오션이라며 적극적인 이주 노동자 사역을 주문했다.

그의 이주 노동자 사역은 이제 한국을 넘어서고 있다. 현재 스리랑카에 한국어 학교를 만들고 있다. 사역 초창기 때 경기도 광주에서 오갈 곳 없는 스리랑카인 두 명을 먹이고 일자리까지 알아봐 준 것을 계기로 스리랑카 정부의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 그는 스리랑카 사역이 정착되면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 등에도 선교와 복지를 위한 학교와 센터를 확장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사역의 종착지는 아프리카다. “아프리카의 사망자 중 절반 정도가 에이즈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한 지역을 선정해 에이즈를 퇴치시킨다면 아프리카 각 나라마다 그 모델을 채택하지 않겠습니까? 종국엔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퇴치운동을 벌이며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