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코너-오종석] 자리 비운 駐中대사
입력 2010-02-11 18:45
베이징 외교가는 요즘 긴박하다.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8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우선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구두친서를 갖고 간 왕 부장이 김 위원장과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이런 상황에서 9일 귀국한 왕 부장과 함께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 부상은 11일까지 연일 6자회담 의장이자 중국 측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특별대표 등 중국 측 외교 관계자들과 만나 6자회담 재개 문제 등을 협의하고 있다. 베이징의 각국 외교 공관은 정보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려고 초비상이다.
이런 와중에 류우익 주중 대사는 한국에 있다. 사적인 일로 자리를 비운 건 아니다. 8일 시작된 재외공관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12일 공관장회의가 끝나지만 류 대사는 1주일 휴가를 더 얻어 설 연휴를 보내고 20일쯤 귀임한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부임하는 바람에 주변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번 기회에 작별인사를 못한 지인들도 만나고, 주변 정리도 하기 위해 휴가를 얻었다는 게 대사관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중요한 시기에 현장을 지휘해야 할 류 대사가 2주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게 잘 납득되지 않는다. 현장에서 중요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꼭 공관장회의 일정을 다 마쳐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1주일 추가 휴가는 더욱 그렇다. 김 위원장의 동향이나 북핵 문제 정보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 아닌가.
류 대사는 부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북한 정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언론 안테나(정보)를 따라 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또 “김 위원장 동향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까지 얘기했다. 언론과의 정보공유 필요성과 김 위원장에 대한 무분별한 보도를 의식한 발언이지만 대사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방기한 측면도 있다. 류 대사의 이번 휴가가 행여 이런 사고(思考)에 바탕을 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류 대사는 지금 한국에서 바쁘다. 기자간담회를 갖고 잇따라 TV 대담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주로 지난해 12월 말 부임한 이래 40일 동안의 대사 경험을 설명하는 자리다. 현 정권 초기 대통령실장을 지냈고 지금도 언제라도 대통령과 소통이 가능한 ‘힘 있는 대사’라서 그런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최근 베이징으로 류 대사를 찾는 유력 인사도 적지 않았다. 공식일정이라고는 하지만 이재오 국가권익위원회 위원장, 곽승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 한·중외교협회장인 김무성 의원, 박영준 국무총리실 차장,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등이 류 대사를 만났다. 류 대사는 이들을 접대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렇게 되자 류 대사가 중국보다 한국 국내 상황에 더 관심을 갖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신정승 전 대사를 전격 교체할 당시 청와대에서는 중국 고위층과의 교류 및 정보 부족 등을 이유로 내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후임으로 힘 있는 류 대사가 임명된 것도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중국 측도 환영의 뜻을 밝혔다. 류 대사는 부임 이후 짧은 기간이지만 쓰촨(四川)성 등 지방 방문에 나서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또 왕자루이 부장, 양제츠 외교부장 등을 비롯해 당, 정, 의회의 주요 인사들을 두루 만나 신임인사를 나눴다. 베이징대 교수 등 주요 학자들과 중국 내 외국 공관장들과도 접촉을 가졌다.
류 대사는 부임에 앞서 “베이징은 북으로 가는 길목”이라며 중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남북관계 진전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 류 대사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것이다. 류 대사가 부임 당시의 다짐을 지키려면 중국 현지 상황에 더 많은 집중을 해야 하지 않을까.
베이징= 오종석 특파원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