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포키 연구소’ 1년… 떡볶이 세계화, 어디까지 왔나
입력 2010-02-11 20:26
자, 여기 빨간색을 입은 떡볶이가 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1인분에 2000원짜리 그것과 닮았다. 포크로 떡을 찍으니 소스 배어나오는 모습이 탐스럽다. 그리고 한입.
어? 고추장 맛이 거의 없다. 대신 토마토 향기가 혀와 코를 자극한다. 9일 경기도 용인시 떡볶이연구소에서 먹은 ‘매운 토마토 떡볶이’는 토마토소스 스파게티 맛과 비슷했다.
여수경(24·여) 연구원이 두 번째 떡볶이를 시식접시에 올릴 때 갈색 소스가 끈적거리며 긴 꼬리를 남겼다. 물엿이 들어간 것 같다. 호두와 잣도 섞여 있다.
포크로 찍으니 떡이 바삭거린다. ‘희한하네….’ 입에 하나 넣자 떡이 ‘파삭’ 부서진 뒤 곧 부드럽게 씹혔다. 견과류에 부딪힌 혀를 달달한 소스가 휘감는다. 그런데, 이 향은 뭐지?
“홍삼소스인데, 어때요?” 홍삼향을 최대한 으로 살리되 홍삼 특유의 쓴 맛을 마스킹(masking·특정한 맛을 가리는 것)했다. 파삭 씹히는 건 떡을 구웠기 때문이다. 여 연구원은 “레시피(조리법)는 아직 비밀이에요”라고 한다.
소스
지난해 3월 ‘떡볶이 세계화’를 기치로 떡볶이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떡볶이는 비빔밥 김치 전통주와 함께 농림수산식품부가 선정한 한식 수출 4대 주력식품이다.
한국식품연구원에서 쌀 식품을 연구하던 이상효(53) 박사가 소장을, 맥도날드 불고기버거 소스를 개발했던 김용수(47)씨가 소스개발팀장을 맡았다. 조리학을 전공한 여씨 등 젊은 연구원 4명이 합류해 진용을 갖췄다.
임무는 외국인이 좋아할 떡볶이 만들기. 타깃은 미국 유럽 동아시아 3개 권역으로 했다. 소득이 높아 외식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떡볶이 맛의 80%는 소스에 달렸다. 고추장과 간장 소스만으로 내놓기엔 세계인의 입맛이 너무 다양하다.
김 팀장의 행군이 시작됐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 일본 중국을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각종 음식축제에 참가했다. 국내에선 외국 유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젊은 연구원들은 각국의 전통요리와 향신료를 분석했다.
“일본은 약간 달면서 덜 매운 걸 좋아하고, 중국은 같은 매운 맛이라도 고춧가루 대신 ‘마라’라는 향신료가 들어가야 하더군요. 유럽과 미국은 우유크림이나 치즈 맛을 즐기고요. 장님 코끼리 만지듯 다니다 보니 큰 그림이 그려졌어요.”
연구소는 떡볶이 소스를 개발하며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전통 재료를 사용할 것, 고급화할 것, 간장 된장 고추장을 베이스로 하되 타깃 지역 입맛에 철저히 맞출 것. 상하이소스(중국), 데리야키소스(일본), 크림소스(미국·유럽) 등도 이렇게 탄생했다고 한다.
지난 1년간 완성된 떡볶이 소스는 20가지가 넘는다. 절반은 한국식품연구원 관능평가에서 9점 만점에 7점 이상 받았다. 관능평가는 요리의 외관, 색깔, 향기, 맛, 후미(後味·뒷맛), 기호도 등 6개 항목으로 점수를 매긴다. “7점 이상이면 ‘정말 맛있다’고 하는 수준이죠.” 김 팀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가장 높은 점수는 간장소스가 받았다. 궁중떡볶이에 사용되는 소스를 개량한 것이다. 평균 7.86점. 이어 칠리(7.61), 된장크림(7.54), 춘장(7.50), 고추장(7.32), 바비큐(7.25), 돈가스(7.18), 매운토마토(7.11), 된장(7.06) 소스 순이었다. 7점 이상은 상반기 중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상용화할 계획이다. 7점 이하 소스는 전면 재검토 작업을 하고 있다.
연구소는 이들 소스로 떡볶이를 만들어 국내 중국 유학생, 일본 도쿄푸드쇼와 네덜란드 세계음식축제 참가자 등 외국인 300여명에게 먹여봤다. 중국인은 간장 된장크림 고추장 순으로 좋아했고, 일본인은 고추장과 된장크림을 선호했다. 유럽에선 독일인의 떡볶이 호감도가 가장 낮았다. 네덜란드인은 고추장 떡볶이를 간장소스 떡볶이보다 높게 평가했고, 미국인은 반대였다.
메뉴
소스로 외국인 입맛에 맞춘 떡볶이는 부가가치를 높여야 돈이 된다. 떡볶이의 고급화가 필요했다. 다양한 부재료와 조리법을 고안해 소스마다 3∼5가지 요리를 창조하고 있다. 개발된 메뉴에는 ‘TRM 1-1’ 같은 명칭이 붙는다. TRM은 떡볶이 연구메뉴(Topokki Research Menu), 1-1은 1번 소스를 사용한 첫 번째 요리란 뜻이다.
TRM 19-1은 떡에 돼지고기를 말아 입힌 뒤 바비큐소스를 발라 구운 일종의 ‘떡말이’다. TRM 19-2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바비큐립(돼지갈비)에 곁들이는 사이드 메뉴. 돼지갈비의 느끼함이 가시도록 한 차례 구워 바삭거리는 떡에 바비큐소스를 얹었다.
떡을 미트볼처럼 둥글게 뭉쳐 각종 야채와 함께 소스에 버무린 TRM 19-3, 가래떡을 동전처럼 잘라서 다진 고기를 두른 뒤 꼬치에 꽂아 튀긴 바비큐소스 떡꼬치(TRM 19-4)도 있다.
9번 매운토마토소스에는 담백한 맛의 부재료를 사용한다. 단호박이 대표적이다. 단호박을 그릇 모양으로 자르고 안에 떡볶이를 넣은 뒤 치즈를 뿌려 내놓거나(TRM 9-1), 치즈·고구마를 넣어 만든 떡과 각종 야채를 함께 볶기도 한다(TRM 9-2).
차가운 떡볶이도 있다. TRM 7-1은 우동면보다 약간 두껍고 말랑말랑한 떡을 이틀 정도 식힌 뒤 여러 야채와 함께 발사믹소스에 버무린 전채요리다. 넓적하고 얇은 떡에 야채를 올리고 돌돌 말아 소스에 찍어 먹는 TRM 7-2는 일종의 ‘떡 또띠야’다.
지금까지 개발된 메뉴는 100가지 정도. 5월 제2회 ‘서울 떡볶이 페스티벌’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Topokki
떡볶이를 해외시장에 내놓으려면 외국인도 부르기 쉬운 이름이 필요했다. 영문표기법을 따르자면 떡볶이는 ‘ddeokbokki’다. 너무 어렵다. 언어학자 요리연구가 마케팅전문가 등이 모여 원발음에 가까운 ‘토포키(Topokki)’란 이름을 지었다.
사업 방향은 고급화와 패스트푸드화 두 갈래다. 요리 한 가지에 1만원 이상인 떡볶이 레스토랑을 프랜차이즈화하고, 슈퍼마켓에서 판매될 인스턴트 떡볶이 상품을 개발하고, 거리에서 차량을 이용해 판매하는 왜건형 점포 사업안도 마련 중이다.
이를 위해 한국식품연구원 및 한국산업기술대학교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자문기관으로는 롯데호텔을 선정했다. 유명 요리학원 2곳과 제휴해 떡볶이 조리사 과정도 신설했다.
김 팀장은 “스파게티 쌀국수 스시도 모두 거리음식에서 시작됐다. 우리 거리음식 떡볶이가 그 신화를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3분 요리’ 시리즈를 만든 오뚜기중앙연구소에서 21년간 근무했다.
-떡볶이로 어떤 ‘맛’을 내려는 거죠?
“신맛 단맛 쓴맛 짠맛의 4대 맛보다 더 중요한 게 감칠맛이에요. 일본에선 우마미(旨味)라고 하죠. 또 맛에는 탑(top), 바디(body), 엔드(end)가 있어요. 탑은 혀에 처음 닿을 때, 바디는 씹을 때, 엔드는 삼키고 난 뒤 느껴지는 맛입니다. 세 가지가 잘 조합될 때 감칠맛이 나와요. 떡볶이에 그런 맛을 입혀야 외국에서 팔릴 겁니다.”
-지금까지 만든 떡볶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요?
“된장크림소스 떡볶이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처럼 만들었는데 외국에서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소스의 된장 비율이 20%가 넘는데 냄새가 없어요. 양복을 입은 한국인의 느낌이랄까.”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은 언제 시작되나요?
“우리 연구는 농식품부가 발주한 3년짜리 프로젝트예요. 기초 연구만 끝나면 상용화 작업이 병행될 겁니다.”
-미국 뉴요커들이 1∼2만원씩 내고 사먹는 떡볶이… 가능할까요?
“저는 이미 답을 찾은 것 같은데요?”
용인=글·강준구 기자, 사진·이동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