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9 ×12㎞ 호랑이를 그리다… ‘GPS 드로잉’ 109.7㎞ ‘호랑이 루트’ 도전

입력 2010-02-11 17:23


서울을 종이 삼아 글자를 써보려 했다. 문구는 독자들께 드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펜은 스마트폰이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위성항법시스템)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폰은 자동차 내비게이션처럼 이동경로를 지도에 표시해준다. 글자 모양대로 여의도에서 14.4㎞, 서북부에서 78.4㎞를 돌아다녔지만 서울 도로는 이동경로가 문장이 되기엔 너무 구불구불했다.

설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자고 마음을 고쳐먹은 건 지난 8일이었다.

GPS 드로잉

‘GPS 드로잉’은 넓은 지역을 이동하며 GPS 단말기에 기록된 위치정보로 지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다. 2000년부터 작업해온 영국인 제레미 우드와 휴 프리어가 시초로 꼽힌다.

둘은 GPS 단말기로 영국 런던 인근 노팅햄에 20㎞짜리 나비를 그렸다. 브라이튼 해변에서 자전거로 오가며 그린 대형 크루즈(아래 그림1)는 길이 68㎞, 영국 남부를 달리며 쓴 글자 ‘IF’는 112㎞에 달했다(그림2). 이런 그림을 웹사이트(www.gpsdrawing.com)에 올리고 있다.

10년이 지나며 GPS 드로잉은 해외에서 대중화됐다. 2008년 여름, 미국 카펫 디자이너 토머스 베레진스키는 불어난 체중을 빼기로 결심했다. 달리기를 택했고, 방법이 독특했다.

달리기 전 뉴욕 지도를 펴놓고 밑그림을 그렸다. 손에 GPS 단말기를 들고 그림의 선을 따라 달린다. 달리기가 끝나고 단말기를 컴퓨터에 연결하면 화면의 지도에 사람 얼굴이나 개 모양이 나타났다. 이 재미에 빠져 1년 만에 7㎏을 줄였다. 이렇게 달린 코스는 웹사이트에 올려 사람들과 공유한다.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인 빈센트 몬텔롱고도 GPS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지도를 보다 1980년대 유행했던 비디오게임 ‘팩맨’ 캐릭터를 떠올린 뒤부터다. 그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GPS 드로잉은 운동하면서 도시 경관을 즐기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예술과 광고로 진화

미국이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한 GPS의 사용을 민간에 허가한 건 1984년. 26년이 흐른 지금 GPS 드로잉은 광고에도 활용되고 있다.

몇 해 전 BMW가 제작한 광고에선 오토바이 한 대가 도심 골목 구석구석을 달린다. 광고 마지막 화면은 그 도시의 위성지도. 오토바이가 달린 궤적이 ‘unstoppable(멈출 수 없는)’이란 글자로 나타난다. GPS 드로잉을 광고 제작에 도입한 것이다.

BMW는 누구나 GPS 드로잉 작품을 올릴 수 있는 사이트(http://gps.bmw-motorrad.com)도 만들었다. 사이트 선전문구는 ‘Draw all over the planet(온 지구에 그림을 그려라)’. 세계 곳곳에 BMW가 달리고 있음을 강조하는 광고 전략이다.

국내에서도 등산이나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GPS 드로잉은 낯설지 않다. GPS 단말기로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등산로 및 주행로 정보 지도를 내려받아 같은 경로에 도전해보고, 자신이 개척한 루트를 남들과 나누기도 한다.

지난해 한국에 상륙한 아이폰 등 스마트폰은 GPS 단말기를 따로 구입해 들고 다녀야 하는 부담과 수고를 덜어준다. 스마트폰을 위한 GPS 관련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앞으론 거의 모든 휴대전화에 GPS 장치가 들어갈 전망이다. 한국에서도 GPS 드로잉이 놀이로, 유행으로 번질 조건이 갖춰졌다.

재도전, 호랑이 그리기

8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용산구 성동구 중구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에 걸쳐 지도 밑그림이 완성됐다. 포효하는 호랑이 얼굴. 도곡동에서 시작해 망우동에서 끝난다. 성공 확률을 높이려 크게 그렸다. GPS는 기계에 따라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까지 오차가 있다. 그림이 커야 오차가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폰에 GPS 애플리케이션의 하나인 에브리트레일(Everytrail)을 깔았다. 에브리트레일은 이동 루트를 스마트폰 화면의 지도에 표시해준다. 이 아이폰을 들고 자동차로 ‘호랑이 루트’를 달리면 된다.

여정이 완료되면 바로 웹사이트에 그림을 올릴 수 있다.

출발 전 철저한 준비는 필수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인지(자전거 도로일 수도 있다), 일방통행은 아닌지, 좌회전을 허용하는 교차로인지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주요 교차로와 도로를 검증하는 데 3시간이 걸렸다.

밤 11시15분. 도곡동 대치중학교 뒷길에서 호랑이 그리기가 시작(왼쪽 지도①)됐다. 강남은 길이 곧아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1시간이 걸렸다. 성수대교를 건너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호랑이 입 안쪽 곡선(지도②)을 표현하기 위해 용비교 방면으로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좌회전이 금지돼 있다. 조수석에서 지도를 보며 앉아 있던 팀장이 아이폰 들고 차에서 내려 뛰어야했다. 좌회전 금지 교차로는 거듭 등장했고 그때마다 팀장은 내려서 뛰었다.

두 번째 위기는 이태원에서 있었다. 호랑이 콧구멍을 표현하려면 한남동 고급 주택가 골목에서 작은 원(지도③)을 만들어야 했다. 깜깜한 밤이라 여러 번 길을 잃을 뻔했다. 호랑이 눈을 그리기 위해 신당동 현대아파트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아이폰 배터리가 다 떨어졌다. 일단 종료.

다음날 오전 10시30분, 전날 종료 지점에서 작업을 재개했다. 아파트 단지 내부가 호랑이 눈의 아랫부분(지도④)이었다. 이어 루트대로 달리고 달려 오후 2시 망우동 이마트 앞에서 그림 그리기가 완료(지도⑤)됐다. 이틀간 7시간을 투자해 총길이 109.7㎞, 가로 9㎞, 세로 12㎞에 이르는 초대형 그림이 완성됐다.

에필로그

2008년 5월 스웨덴 예술가 에릭 노르데난카르는 ‘The Biggest Drawing in the World(세상에서 가장 큰 그림)’란 웹사이트를 만들고 세계지도에 그려진 자신의 자화상(그림3)을 올렸다. 국제 물류서비스 업체 DHL을 통해 GPS 단말기를 미리 계산된 순서대로 6개 대륙, 62개국에 배달시킨 뒤 위치정보 기록을 지도에 표시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55일간 11만664㎞를 이동해 탄생했다는 지상 최대의 그림 소식은 일제히 언론에 보도됐다. 그러나 이 그림은 보름 만에 유명세를 노린 사기극으로 드러났다. 네티즌들이 이동루트 등에 의문을 제기하자 DHL은 확인을 거쳐 “그런 프로젝트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래서 호랑이 그림의 증거를 남기기로 했다. 경인년을 맞아 호랑이 턱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싶거나, 호랑이 앞다리를 쓰다듬으며 조깅하고픈 독자들은 국민일보의 도전 경로(www.everytrail.com/view_trip.php?trip_id=492298)를 참조하시길.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