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1) 호암 이병철과 삼성그룹] 사업보국 신념·도전정신 세계 초일류 기업 낳다
입력 2010-02-10 18:05
투자를 주저하면 미래는 없다. 대한민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올려놓은 힘은 최고경영자(CEO)의 혜안과 과감한 투자, 그리고 도전정신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지금 한국경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기업가 정신이 절실하다. 본보는 한국 기업가들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리더십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삼성이 진출하면 한국의 전자업계는 다 망한다.”
1960년대 후반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전자산업 진출을 발표하자 한국 전자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금성사 등 기존 메이커는 물론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 저지 운동을 폈다. 정부의 허가 절차도 지지부진했다. 이 회장은 그들을 설득하다 못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찾아가 직접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설명했다.
일본은 1950년대 전자산업에 본격 진출해 불과 10여년 만에 서구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고 있었고, 대만도 전자산업 도입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외제 부품을 도입해 조립하는 초보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흑백 TV 값은 당시 웬만한 봉급생활자로서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쌌다.
이 회장은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노동력·부가가치, 내수와 수출 전망 등을 볼 때 국가적 사업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술만 도입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박 대통령은 즉시 전자산업 전반에 대한 개방 지시를 내렸고, 1969년 1월 13일 이 회장은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했다.
이 회장은 1977년 반도체 산업 진출을 결정할 때도 주변의 반대에 부닥쳐야 했다. 첨단기술 산업인 데다 막대한 투자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국내 기업이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이유에서다. 회사 안팎에서는 “이러다 삼성 전체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지만 이 회장은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반도체 산업 진출을 결정했다.
최대 라이벌이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이 회장의 승부욕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이 회장은 사업상 경쟁뿐 아니라 골프에서 지는 것도 아주 싫어해 한번 지기라도 하면 다음 시합에선 반드시 승리해 지난번의 패배를 털어내곤 했다는 것.
정 명예회장은 당시 “삼성이 반도체 산업에 진출했을 때 누구도 이 사업이 오늘날과 같은 성공을 거두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성공을 위한 치열한 승부근성을 갖고 자신의 단점을 되짚어 스스로 고쳐가며 성공의 길을 현실화해 나간, 삼성이 걸어온 길 한가운데에는 이 회장이 있었다”고 전했다.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도 “이 회장을 만난 것은 그가 노년에 접어든 이후였는데 그때도 그는 젊은이보다 더한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에서 유복한 집안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300석에 달하는 재산을 받아 1936년 두 명의 지인과 함께 1만원씩 출자해 경남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창업했다. 그것이 첫 도전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은행대출 전면금지 정책으로 협동정미소, 일출자동차, 토지 사업을 청산하면서 실패를 맛본다. 이 회장은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재기를 꿈꾼다. 무역업에서 제조업으로, 중화학공업과 전자산업을 거쳐 최첨단 반도체 산업 등 1987년 11월 19일 타계할 때까지 이 회장의 77년 인생은 도전의 역사였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136조2900억원, 영업이익 10조9200억원으로 지멘스, 휴렛팩커드(HP) 등을 제치고 당당히 세계 최대 전자업체로 등극했다. 자본금 3만원으로 출발한 삼성그룹은 지난해 말 기준 65개 계열사에 27만7000명(국내 17만3000명 포함) 직원을 거느리고 매출 200조원을 넘는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섰다.
국내외 학자들은 오늘날 삼성을 일으킨 원동력을 이 회장의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 ‘인재제일’ ‘사업보국(事業報國·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 경영 이념에서 찾는다.
장진호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고 이병철 회장은 경제 환경과 산업 구조의 끊임없는 변화를 직시하고 영속하는 기업을 만들기 위해 ‘혁신과 창조에 앞장서는 것이 기업인의 운명’이라고 주장했다”며 “1960년 한국의 10대 그룹 중 2008년에도 10대 그룹 안에 남아있는 것은 삼성과 LG뿐”이라고 말했다.
랑리 박 바흐조 소르본대 극동연구센터 연구원과 도미닉 바흐조 소르본대 교수는 이 회장이 한국의 신유교주의와 일본식 경영 시스템인 재벌과 계열, 독일식 생산 방식, 미국식 관리 방식을 종합해 독창적 경영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미국과 서유럽의 기술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인재 양성에 파격적으로 투자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이명희 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