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우리가 섬겨야 할 작은 자
입력 2010-02-10 17:43
이사야 58장 5~9절
마태복음 25장 31~41절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Big’이라는 상징을 추구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긴 듯합니다. 큰 건물, 큰 집, 많은 연봉, 비싼 차, 일류 대학, 눈부신 미모…. 그리고 이 ‘큰 것’을 성취한 사람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이를 위해서는 인격, 도덕, 양심도 묻어두는 ‘힘의 논리’가 판치고 있습니다. 오늘 이러한 세상 속에서 교회조차 때로 ‘큰 것’을 추구해오지 않았는지,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권위를 잃고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모습은 아니었는지 자성합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할 때 예수님의 최후 심판의 말씀(마 25:31∼41)이 주는 교훈은 의미심장합니다. 인생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신의 삶이 정산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심판 기준은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옥에 갇힌 이들을 돌아보았는가였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지극히 작은 자’로 칭하시고 ‘내 형제’로 자신과 일치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큰 부담 없이 행할 수 있는 작은 관심과 손길을 주거나 주지 아니한 그것이, 천국행과 지옥행을 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최후심판’ 비유의 핵심은 작은 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말구유에서 나시고, 목수로 일하셨고, 변방 갈릴리에서 활동하셨고, 찾아가거나 곁에 모인 사람들도 방황하는 무리(오클로스)와 땅의 사람들(암하레츠)이었습니다. 그의 복음 사역과 말씀 증언은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님은 로마의 식민통치권력, 헤롯의 괴뢰정권,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 로마권력에 기생하는 가진 자들을 오히려 책망하며 화를 선언하셨고, 대신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하시며 작은 자를 융숭히 대하셨습니다. 작은 자의 아픔을 온몸으로 사셨기에 작은 자의 고뇌와 갈망을 전 존재로 이해하고 끌어안으셨습니다. 이렇게 사신 이 예수를 우리는 우리의 구주로 믿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러한 삶을 살고 말씀을 주셨을까요? 성서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잠 14:31)라고 경고하였고,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연약한 작은 자들에 대한 돌봄(사 58:5∼9)이라고 가르치셨고, 약한 이, 미련한 이, 작은 이를 들어 강한 자, 지혜 있다고 하는 자, 큰 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고전 1:27∼29) 하는 역설의 논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와 작은 이를 향한 하나님의 편애 속에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구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정식’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삶은 이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실천한 삶이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면, 우리 주위에 나눠야 할 ‘슬픔’이, 치유해야 할 ‘아픔’이, 나눠줘야 할 ‘빈손’들이, 해방시켜야 할 ‘눌림과 묶임’들이, 채워줘야 할 ‘궁핍과 소외’가 너무도 많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섬겨야 할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먼저 눈에 크게 보입니다. 아이티의 절규와 북한 땅의 신음이! 그리고 설을 앞두고 일자리를 구하는 이웃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조성기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