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식물 이야기] 늘 푸른 송악의 생명력

입력 2010-02-08 18:05


입춘 지나자 시나브로 땅 밑에 몸을 감추었던 식물이 새 잎을 낼 참이다. 대개의 식물들은 봄볕 맞으며 잎을 피워낸다 하지만 거꾸로 봄이 아닌 가을에 잎을 내서 푸른 잎을 달고 겨울을 나는 식물들도 있고, 사시사철 푸르른 잎을 달고 있는 식물도 존재한다.

전북 고창 삼인리 선운사의 겨울은 그런 식물들이 있어 겨울에 더 푸르다. 꽃 지는 가을에 푸른 잎이 나고, 푸르른 채로 겨울을 나는 꽃무릇이 땅을 덮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자란 덩굴식물 송악이 있기 때문이다.

송악은 일반 가정에서 키우는 아이비와 같은 종류의 식물이다.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상록성 덩굴식물로, 소가 잘 먹는다 해서 ‘소밥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송악은 홀로 서지 않고 줄기와 가지에서 잔뿌리를 내려 주변의 바위나 나무에 달라붙으며 기어오른다. 공기 중에서 호흡하는 이 잔뿌리는 기근(氣根)이라 부른다.

송악이 주위의 나무를 친친 감고 올라 짙은 그늘을 드리우면 잘 자라던 나무가 햇살을 받지 못해 생명을 잃는 수도 있다. 그러나 송악에게 나무의 생명을 앗아갈 생각은 없었다. 송악은 스스로 광합성을 해서 양분을 만들어내지만, 얄궂게도 홀로 설 힘이 없어 곁의 바위나 나무에 기댈 뿐이다.

천연기념물 제367호인 고창 삼인리 송악은 다행히 다른 생명체가 아니라 바위 절벽을 타고 올랐다. 오래 공존할 수 있는 좋은 자리다.

송악은 높이가 15m나 되는 절벽 꼭대기까지 올랐고, 좌우로도 넓게 펼쳤다. 뿌리 부분의 둘레는 80㎝쯤 되는데, 전체 규모가 하도 커서 줄기는 왜소해 보인다. 줄기에서 돋아난 뿌리가 절벽을 타고 오르는 모습에는 그가 살아온 수백 년 세월의 풍상이 그대로 묻어 있어 볼수록 신비롭다.

게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싱그럽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정열을 간직한 게 더 놀랍다.

작은 씨앗에서 비롯된 하나의 생명체가 이토록 오랫동안 우람하게 자랄 수 있다는 건 식물에게만 나타나는 신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개울가의 이 푸르른 송악 앞에 서 있으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속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 같은 속설이 아니어도 푸르른 나무를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절로 맑아지고도 남음이 있다.

잿빛 겨울에도 식물을 더 가까이 해야 할 까닭은 초록의 잎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천리포수목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