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아버지-뇌병변 아들 가슴으로 주고 받는 이야기

입력 2010-02-05 18:31


“아들아, 넌 남과 다르지 않아” “아버지, 자립 지켜보세요”

아버지가 기도를 시작한 것은 아픈 아들 때문이었다. 건강하게 해 달라고, 편견을 이겨낼 강한 의지를 심어 달라고 아버지는 지난 세월 수천 번, 수만 번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뇌병변 장애 1급인 아들은 아버지의 기도 속에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 석사학위를 따고 결혼해 지금은 아버지 회사에서 함께 일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축복의 통로”라 불렀고, 아들은 아버지를 “편안한 베개 같은 분”이라고 했다. 최근 서울 독산동 대우인쇄교역 공장 사무실에서 이 회사 권영환(61) 사장과 아들 성민(33)씨를 만났다. 아버지와 아들은 얼굴을 마주 보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고, 몸이 불편한 아들은 한 단어 한 단어 말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곁에서 어머니 정난희(53)씨가 얘기를 거들었다. 말보다는 가슴으로 오가는 대화가 많은 시간이었다.

맏이의 출산, 그리고 장애

1977년 3월, 태어난 지 20일이 채 안된 아기가 갑자기 경기 증세를 보였다. 교정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지방 출장 중이었다.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갔던 아기 큰어머니가 급히 어머니를 찾았다. 신생아 황달이라고 했다. “그대로 두면 죽고, 교환 수혈을 하면 살기는 하겠지만 장애가 올 수 있다”는 게 의사 설명이었다. 어머니는 홀로 교환 수혈을 결정했다. 아기 배꼽으로 피를 다 빼낸 뒤 다른 사람의 피를 집어넣는 대수술이 두 차례 진행됐다. 3주 정도 후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날벼락 같은 소식에 그저 “잘 선택했다”며 어머니를 다독였다.



아버지: 넌 다섯 살이 될 때까지도 걸음마를 못했어. 첫돌 이후 서서히 목과 손이 돌아가고 얼굴 근육도 굳어갔지.

아들: 아빠, 속 많이 상하셨지요?

아버지: 그때는 ‘빨리 치료해 낫게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우리 잘못도 아니고, 네 잘못도 아니니까. 너를 데리고 유명하다는 전국의 재활원과 병원을 기를 쓰고 찾아다녔지만 소용없었단다. 겨우 걷기 시작한 뒤에도 걸핏하면 넘어졌는데 머리 무릎 등 50번은 넘게 꿰맸던 것 같아.



신앙생활을 시작하다

부부는 아기가 다섯 살이 됐을 때 처음 교회를 나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첫 예배에서 어머니는 속 깊은 곳에서 북받쳐오르는 뭔가에 한참을 엉엉 울었다. 아버지 역시 큰 은혜를 받았다. ‘아기를 낫게 하는 게 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목적이 있으셔서 이런 장애도 주셨구나’라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 전에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널 빤히 쳐다보기라도 하면 쫓아가서 한대 때려주고 싶었는데, 하나님 은혜를 알고 나서는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민씨가 여덟 살 때 교회를 개봉동 집 근처에 있는 광진교회로 옮겼다. 민경설 목사가 건물 지하에 막 개척한 교회였다. 이 교회를 꾸준히 출석하면서 아버지의 신앙은 한층 깊어지고 넓어졌다. 아들에 대한 기도 내용도 바뀌었다. 권 사장은 현재 광진교회 장로로, 부인 정씨는 권사로 봉직하고 있다.

아버지: 널 무조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는데, 어느 날 ‘내 신앙의 바벨탑을 쌓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나니까 부끄럼 없이, 누구한테든 떳떳하게 널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지. 너를 위한 큰 비전도 그때 세울 수 있었단다.

아들: 절 위해 항상 기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아빠 건강 좋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성민씨는 권 사장이 요즘 고혈압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성민씨의 학창 시절



성민씨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1학년 담임교사는 아이를 맡을 수 없다고 했다. 부모는 학교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다치거나 무슨 문제가 생겨도 절대 학교에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성민씨는 공부를 썩 잘했다. 특별히 가르친 것도 없는데 다섯 살 때부터 혼자 책이나 신문을 읽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책을 잔뜩 사 줬다. 또 타자기를 구해다 주고 자판 치는 법을 가르쳤다. 성민씨는 공책 대신 타자기를 들고 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성민씨를 거부하는 일은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반복됐다. 그때마다 부모들은 학교에 사정사정하며 끝내 아이가 일반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성민씨는 이후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 분야 논문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경북 포항에서 어린이집 교사를 하는 김혜정(26)씨와 결혼했다. 양가 친인척과 700여명 하객의 축복 속에 진행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결혼식은 숙연하면서도 은혜로웠다고 한다.

아버지: 너를 남들과 다르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듯 넌 그냥 몸이 불편할 뿐이지 머리도 좋고 의지도 있었기 때문이야.

아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아빠가 저를 매일 아침 태워다 주시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데리러 오셨던 일, 정말 감사 드려요.

권 사장은 80년 공무원 생활을 끝내고 종로에 작은 선물가게를 차렸다. 88년에는 직원 두 명과 함께 포장박스 전문업체 대우인쇄교역을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지금 직원 40여명에 연 매출 100억원 이상의 건실한 업체로 성장했다. 어머니 역시 성민씨가 대학에 입학한 이후 본격적으로 회사 일에 뛰어들어 현재 자회사 죠이프린테크 대표를 맡고 있다. ‘죠이’는 성민씨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죠이선교회에서 따왔다. 죠이프린테크 직원 19명 중 17명은 장애인이다.

부자의 또 다른 비전, 장애인 복지사업



아버지와 아들은 장애인 복지 사업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이미 서울시에 사회복지법인 ‘죠이복지재단’(가칭) 허가 신청을 낸 상태다. 광명시에 200평짜리 비닐하우스 9동과 장애인 기숙사로 쓸 집도 마련했다. 직장 체험과 각종 치유, 교육 기능을 겸비한 복지관도 건립할 예정이다. 다만 서울시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고심이다.

“장애인들은 학교를 졸업해도 취업과 연결이 잘 안 되고, 직장에 들어가도 적응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우리 복지관은 생산 판매 시설, 원예 치료 및 교육 시스템, 예배실, 문화공간 등을 다 갖추려고 합니다. 허가만 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는데 공무원들은 틀에 박힌 복지관만 생각하고, 서류로만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답답하죠.”

권 사장은 이 복지관이 설립되면 아들과 며느리에게 운영을 맡길 계획이다.

아버지: 사회복지 일을 맡기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허락하신 거란다. 너를 계기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큰 그림을 그리게 됐으니 넌 축복의 통로인 게야.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너를 세상에 내놓고 떳떳하게 키우지도 못했지.

아들: 저에게 아빠는 항상 편하게 머리를 대고 쉴 수 있는 분이세요. 이제 저도 다 크고 결혼까지 했으니 두 분은 편하게 놀러 다니시고 외식도 하세요. 저 스스로 든든히 서가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아버지는 끝으로 장애인 자식을 둔 부모들에게 전해 달라며 말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안쓰럽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더 사랑받을 사람들이에요. 장애인 아이를 숨기려 하지 말고 떳떳하게 키우세요. 부모들이 다 받아들이고, 기도하면서 최대한 지원하면 아이는 꿈을 이뤄갈 수 있습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