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의문 시로 위안 받아… 마지막엔 시인으로 남고 싶어요”

입력 2010-02-05 18:04


시와 철학의 접점에 선 박이문 美 시몬스대 명예교수

박이문 교수는1930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불문과·동 대학원 졸업. 프랑스 소르본 대학 불문학 박사,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철학박사.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20여년 동안 교수를 지냈고, 91년 귀국해 포항공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 2009년까지 연세대 특별 초빙교수. 현재 포항공대·시몬스대 명예교수. 2006년 인촌상, 2009년 프랑스 문화부장관 학술상 수상.주요 저서로 ‘시와 과학’, ‘예술철학’, ‘노장사상’,‘인식과 실존’, ‘문학과 철학’, ‘환경철학’, ‘현상학과 분석철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축복이냐 재앙이냐’외 다수.

철학자 박이문(80)은 밀도있는 철학적 사유를 시로 형상화해 내는 시인이기도 하다. 철학적 이성으로 세계와 인생, 사물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구하지만 한 발은 항상 문학에 담그고 있다.

그가 최근 시집 ‘부서진 말들’(민음사)을 펴냈다. 1999년 국내에서 출간한 자신의 영문시집 ‘Broken Words’의 한국어판으로 69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이 70∼80년대 미국 보스턴의 시몬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 쓴 시들다. 이 시편들은 당시 현지에서 발표돼 호평을 받았다. 그러므로 수록작에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성찰의 흔적들이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인은 이성으로 진리를 찾아 나선 자신을 다그친다. “도대체 철학이란 뭐란 말인가/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자 우리 가 볼까, 당신과 나/모든 것의 무존재에 대해/그 무엇도 말하지 않으며/침대 위에 드러누워/우리가 너무 늙어버리기 전에”(‘철학을 고찰함’ 일부)

그러나 그런 노력이 벽에 부딪히는 절망을 체험하고 이렇게 토로한다. “이 모든 게 끝났다고 보면/만물이 곧 부조리다/나는 부조리다//산과도 같은/거대한 공허/바보 같은//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향한다/어디에도 없는 그곳으로/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공허’ 일부)

시집의 제목에는 생생한 감정들을 적확하게 다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말의 한계, 자신의 한계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다. “평생토록 말들을 찾아 왔노라/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을//그러나, 이런! 아직도 난 그걸 찾지 못했지/완전히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어떤 시인의 고백’ 전문)

철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와 미국, 한국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왕성한 저작활동을 펼쳐왔다.

4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문촌마을 자택에서 만난 박 교수는 자신을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 사람”이라고 털어놓았다. 철학자로서의 업적에 가려 덜 알려졌지만 그는 이미 7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55년 사상계에 시 ‘회화를 잃은 세대’를 발표하며 등단한 뒤 6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 국내 일간지와 문예지에 많은 시를 발표했다.

그가 시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문학에 심취했던 큰형의 영향이 컸다. 고향인 충남 아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는 일본 유학도중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한 큰형을 통해 문학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서울대 불문학과 재학시절, 문학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한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며 문학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6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면서 시에서 멀어졌지만 60년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시몬스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첫 시집 ‘눈에 덮인 찰스 강변(江邊)’을 낸 것은 등단 24년만인 79년이었다. 첫 시집의 제목은 90년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이 붙여줬다. 그 뒤 ‘나비의 꿈’(1981),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1987), ‘울림의 고백’(1989)을 잇따라 펴냈다. 최근에도 ‘아침 산책’(2006), ‘공백의 그림자’(2006) 등의 시집을 펴내는 등 꾸준히 시작(試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시인은 철학으로 일가를 이룬 석학이지만 시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내비쳤다. “나에게는 시가 더 중요합니다.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지요. 시를 쓸 때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는 서정시보다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세상을 아름답고, 달콤하게 그리는 서정시는 끌리지 않아요. 인생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김기림, 김광균 등 모더니스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시인은 요즘도 시를 쓴다. 지난해에도 수십 편의 시를 썼다. 근자들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과 고국으로 돌아온 후 일간지와 잡지 등에 발표했으나 시집에 묶지 않았던 시들을 찾아 정리하고 있다. 2006년 ‘공백의 그림자’ 이후 쓴 시들을 보태 시집으로 펴낼 생각이다.

시인은 아울러 이달 말쯤 자신의 철학세계를 정리한 ‘둥지의 철학’,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현대 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메를로-퐁티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자신의 논문을 묶은 ‘몸의 철학’ 등 철학서를 펴낼 예정이다.

그는 “시는 문학적 감성을 표출하는 것이고, 철학은 의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 “사르트르처럼 (철학자로서)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시인으로, 창작자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