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우리를 술푸게 하는 것들
입력 2010-02-04 23:35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성경 인쇄였다. 기독교 신앙의 지배력을 감안하면 당연한 처사였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인쇄보다 좋은 테크놀로지는 없었다. 여기에 저항하는 그룹이 있었다. 지식을 독점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이었다. 수도원에서 직업 삼아 성경을 필사하던 수사들도 충격이었다. 그러나 저항은 부당해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했다. 구텐베르크는 인류사의 변화를 가져온 위대한 인물로 기록됐으며,독일 마인츠는 정보혁명의 요람으로 남았다.
19세기 스티븐슨에 의해 실용화된 증기기관차는 초기에 맨체스터∼리버풀 간 화물차로 쓰였다. 뿌연 김을 뿜어내며 스스로 강력히 이동하는 기관차는 괴물과 다름없었다. 짐칸의 용량이나 속도도 엄청났다. 말을 끌며 물건을 운반하던 마부(馬夫)나, 수레를 끌던 인력거꾼들은 망연자실했다. 기관사가 될 생각보다 변화가 두려워 애꿎은 술만 들이켰다. 증기기관차와 기선은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작은 섬나라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이 됐다. 맨체스터는 산업혁명의 발상지다.
우리 앞에도 스마트폰과 3D라는 신기한 물건이 나타났다. 젊은이들에게 스마트폰은 로망이다. 엄지와 검지를 모았다 폈다, 눌렀다 스쳤다 하는 과정에 천변만화하는 화면을 보면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세계 곳곳에서 날씨를 전해주고 대화를 걸어온다. PC로 달려갈 것도, 인터넷에 접속할 것도 없이 손 안에서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 무한정한 애플리케이션을 감상하던 친구가 침을 꼴깍 삼키며 다짐한다. “내 핸드폰도 약정기간 지나면 바로 바꿔야지.” 스마트폰에 저항하면 루저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집단의 선택이므로 개인이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3D 기술은 어떤가. 입체화면의 열풍은 ‘아바타’라는 영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박지성이 쏜 슛이 내 가슴에 꽂힐 판이니 이 역시 거부할 수 없다. 아바타가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승리였다. 한 인기 방송작가는 “아바타를 보면서 중간에 졸았다”고 말했다. 너무 단순한 이야기가 따분했고 우스꽝스런 동물들은 헛웃음을 나오게 했다는 것이다. 네티즌의 답글 가운데 하나만 소개하자. “할머니는 이런 영화 보면 안돼요. 일찍 주무셔야죠.”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는 IT 혁명의 성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테크놀로지가 다는 아니다. 스마트폰에 화면을 넓히는 디스플레이 확장술이 개발되면 기술경쟁은 한단계 끝난다. TV-PC-휴대전화의 3자대결이 3자연합의 형태로 종식되는 것이다. 3D는 입체화면에 촉각과 후각효과를 활용하는, 사람의 감각체계를 최대화하는 수준에서 숨을 고를 것이다.
남는 것은 콘텐츠다. 테크놀로지가 다양한 플랫폼을 구현한 뒤 콘텐츠 확보경쟁에 돌입할 때 내놓을 콘텐츠가 국가 간 경쟁의 핵심이 된다. 이는 통찰력의 싸움이자 창의력 경쟁이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고등학생의 아이디어가 버스 배차 시간을 알려주는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진 것과 같은 방식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놓고도 구텐베르크에 밀린 것은 창조적 활용을 막는 제도의 경직성 때문이었다. 책을 활용하려는 사회의 창의적 욕구도 없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비유하자면 아직도 푸른 잔디구장에서 축구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가혹한 승부차기에 골몰하는 형국이다. 지도자들은 공동체의 창의력을 배양시키는 분위기를 만들기보다 국민들을 억압하고 괴롭힌다. 나라의 어른들이면서도 권력은 즐기고 의무는 외면한다.
이슈가 생기면 ‘집단지성’ 대신 ‘집단반목’만 낳는다. 창의적 담론도, 제3의 대안도 생산해 내지 못하니 새로운 도전의 물결을 헤쳐나갈 ‘창의한국’은 요원하다. 그러니 국민들은 학연·지연 등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원시사회에 놓이게 되고, 그게 부끄러우니 개그콘서트처럼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뭔데!”라며 술만 푸게 되는 것이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