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땅, 꼭 자전거 길로 내줘야 하나”… 팔당 유기농 농부 정정수씨 ‘4대강 한숨’

입력 2010-02-04 17:59


“지렁이가 있는 밭이 좋은 밭이지. ‘거머리 논, 지렁이 밭’이라는 말이 있잖아. 우리네 밭은 지렁이가 우물우물해요. 20년 이상 비료나 농약을 안 쳤으니까.”

자기 밭을 얘기할 때, 농부 정정수(69)씨의 표정은 흐뭇해진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보인다. 그럴 만도 한 게 정씨는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키워 웬만한 서울 직장인 부럽지 않은 수입을 올린다. 8남매 맏이로 태어나 중학교밖에 마치지 못했지만 농사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고, 자식들을 키워냈고, 교회에서 헌금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됐다. 정씨는 용진교회 장로다. 도시에서 장사하던 맏아들 지형(44)씨도 10년 전에 불러 들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서 정씨 일가의 농사는 그렇게 6대째 이어지고 있다.

유기농 성공신화의 주인공

정씨를 부자농사꾼으로 만든 건 유기농이다. 정씨는 한국 유기농업의 모태라고 할 기독농민단체 정농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중반 친환경농업에 뛰어들었다.

“빨갱이 소리 많이 들었어요. 비료 뿌리고 농약 쳐서 생산증대 하자는 시절이었는데, 유기농을 한다니까.”

흔들면 벌레가 툭툭 떨어지는 배추들, 그게 당시 사람들이 가진 유기농의 이미지였다. 판로가 제대로 있을 리 없다. 부추 몇 단, 상추 몇 봉지 싸들고 소비자들을 찾아다녔다.

“아무 것도 모르고 했어요 사실. 돈도 못 벌었고. 앞으로 이쪽(유기농)으로 가야 한다고만 생각한 거지. 깡으로 시작한 거예요.”

대여섯 선구자가 시작한 경기도 팔당지역 친환경농업은 95년 팔당유기농운동본부 창립으로 첫 결실을 얻는다. 22개 농가가 발기인으로 참여해 제법 탄탄한 모양새를 갖췄다. 때마침 서울시와 농협중앙회가 팔당상수원 보호와 상수원지역 농가 지원을 위해 친환경농업 육성사업을 시작했다. 서울시내에 유기농 매장이 열렸고, 하우스 시설자금 등을 저리로 대출해 줬다.

유기농이 돈 되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다. 5000평 농지 전부를 유기농화 했던 정씨 생활도 나아졌다. “정 장로가 유기농 해서 헌금 많이 한다”는 소문이 교회 안팎에 돌았다. 유기농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가구당 연매출이 5000만∼6000만원 되는 걸 보자 주변에서도 속속 유기농으로 전환했다. 그렇게 해서 전체 농지 90% 이상이 유기농으로 경작되는 팔당유기농단지가 형성됐다. 아들 지형씨는 “나가서 사는 것보다 여기가 수입이 낫고 가치도 있다”며 “도시로 나간 동네 청년들이 다 돌아왔다”고 말했다.

팔당에서는 내년 세계유기농대회가 열린다. 상수원보호구역이라는 악조건을 환경농업으로 이겨낸 ‘팔당모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아시아 최초로 유기농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팔당환경농업의 위기

‘팔당환경농업’이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어 내며 세계유기농대회까지 유치했던 팔당유기농단지의 신화는 여기까지다. 지난해 6월 이 지역 농지 15만평이 4대강 사업 예정지로 포함된 사실이 알려졌다. 5개 부락 120여명 농부들이 채소를 키우던 북한강변 하천부지는 수변공원과 공연장, 자전거도로 등으로 바뀐다. 정씨가 사는 송촌리는 농지 90% 이상이 수용될 예정이다. 마을 자체가 붕괴될 판이다.

지난해 말 결국 하천부지 점용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새해부터는 더 이상 하천부지를 빌려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지역 농민들은 팔당댐 건설로 조성된 하천부지를 국가로부터 임대해 농지로 사용해 왔다. 점용 허가는 30년 넘게 매년 연장돼 왔던 것이다.

유기농업의 미래를 확신하며 맏아들까지 불러 앉혔던 정씨는 막막한 심정이다. 4대강 사업 때문에 알토란같은 땅 3000평을 잃게 됐다. 정씨는 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9월 대선 후보로는 유일하게 팔당유기농단지를 방문했다.

“아침에 와서 점심 먹고 서너 시까지 있다 갔어요. ‘다른 지역에 가면 젊은이들이 없는데 여기는 젊은이들이 많고 희망이 있다. 대통령이 되면 적극 도와주겠다’고 하기에 옆에서 내가 듣고 ‘공약 지키는 후보 못 봤습니다’ 그랬지. 그랬더니 ‘나는 그렇지 않다. 당선되면 꼭 다시 오겠다’ 그러더라구. 사실 그 양반이 대통령 돼서 기대가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가니까….”

그는 “4대강 사업이란 게 최소한 이 지역에선 목표가 절대 안 맞는다”고 강조했다.

“지역경제 살리고 일자리 창출한다는데, 농민들이 농토 잃으면 일자리 없어지는 거 아니야? 그리고 공익이라는데, 학생들 먹거리, 시민들 먹거리, 오염원 없는 맑은 수돗물, 이런 게 공익이지 서울 사람들 자가용 타고 와서 바람 쐬고 가는 게 무슨 공익이야? 모든 게 의문덩어리야, 의문덩어리.”

그는 “4대강 사업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여기는 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여기 물 좋아졌어요. 1급수는 안 돼도 2급수는 넘어요. 그거 나라가 관리해서 좋아진 거 아니야. 유기농으로 좋아진 거야. 4대강 사업 목표가 수상레저산업 활성화라는데, 여기는 상수원이라서 어부들은 소형 동력도 못 살리고 노로 배 저어요. 그런데 유람선이 오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정씨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지난해 6월부터 경기도, 국토관리청, 국토해양부 등 온갖 곳을 쫓아다녔지만 정부 측 답변은 한결같았다. 팔당을 제외한다면 4대강 사업 예정지 다른 곳에서도 예외를 주장할 테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부아가 난 정씨는 팔당생명살림 사무실 벽에 걸린 대통령 방문 사진을 거꾸로 돌려놓았다.

땅을 지킬 수 있을까

정씨는 하우스들이 빼곡히 늘어선 하천부지를 가리키며 “이 땅이 정말 사연이 많다”고 말했다. 이 지역 농민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 땅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 73년 팔당댐 건설이 시초였다. 댐이 생기면서 농지 70%가 수몰되거나 강제수용을 당했다. 당시 정씨 부친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5000평을 넘겼다.

댐으로 조성된 하천부지에서 농사를 짓게 된 것도 거저 이뤄진 일은 아니다. 한 농민이 하천부지 전체를 20년 장기임대로 계약한 후 뽕나무밭을 만들려고 했다. 이를 안 농민들은 2년여에 걸친 싸움 끝에 계약을 무효화시키고 경작권을 얻어냈다. 하천부지를 되찾기 위해 토지 환원 소송을 벌이기도 했고, 농지를 가로지르는 45번 국도 확장 정책을 막아내기도 했다. 그런데 4대강 공사로 다시 농지의 절반에 해당하는 15만평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정씨는 “이번에 3000평 뺏기고 나면 2000평 남는데, 그건 농사라고 할 게 없다”며 “아들네 가족까지 내려오라고 해서 같이 농사를 짓는데 앞으로 뭘 하고 사느냐”고 말했다. 그는 땅을 지키기 위한 또 한 번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그게 마치 팔당 농민들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민들은 보상협상은커녕 측량조차 거부하고 있지만, 늦어도 7월에는 공사가 강행될 거라는 얘기가 들린다. 정씨는 “만일 공사를 강행한다면 무슨 일이 날지 모른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손쇠스랑 하나 새로 사다 놨어요. 내 몸 던지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정씨와 팔당 농민들은 이번에도 농지를 지킬 수 있을까.

◆Key Word

팔당유기농단지

수도권 최대 유기농 단지로 생활협동조합과 유통매장을 통해 서울과 경기도 35만 가구에 친환경 채소를 공급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과 양평군 양수면 일대에 유기농가 120여 가구가 밀집해 단지를 형성했다. 연 15만명이 체험과 학습을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한국 유기농업의 발상지로 평가받는다.

세계유기농대회

1972년 프랑스에서 결성된 세계유기농운동연맹(IFOAM)에는 세계 108개국의 750개 회원단체가 있다. 유기농업과 관련된 농민, 학자, 사업가들이 모이는 국제 학술회의 성격을 띤 세계유기농대회는 3년마다 대륙을 순회하면서 열린다. ‘2011 경기팔당 세계유기농대회’는 내년 9월 27일부터 10월 5일까지 남양주시 조안면과 인근 팔당 지역에서 열린다.

남양주=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